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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24) 마오

중앙일보 2011.07.04 09:44


▲리다(李達·이달)는 1921년 7월 23일부터 열린 중국 공산당 창당대회의 소집인이었다. 3년 후 탈당했지만 마오쩌둥과는 교감이 깊었다. 신중국 선포 후 재입당, 우한(武漢)대학과 후난(湖南)대학 총장을 역임했다.1958년 4월 우한에 체류 중인 마오를 방문한 리다(가운데). 오른쪽 첫째는 당시의 후베이(湖北)성 주석 왕런중(王任重·왕임중). [김명호 제공]

마오 “혁명이 별거냐,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지”



1939년 봄, 제3전구사령관 “펑위샹(馮玉祥·풍옥상)이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리다(李達·이달)를 초청했다”는 소문이 도처에 난무했다. 옌안(延安)에 있던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은 11년 전 광저우(廣州)에서 헤어진 리다가 그리웠다. 전시수도 충칭(重慶)에 상주하던 중공 남방국(南方局) 서기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에게 서신을 보냈다.



저우언라이는 리다의 의중을 알 필요가 있었다. 역사학자 뤼전위(呂振羽·여진우)를 파견했다. 뤼는 대학시절 리다의 제자였다.



스승을 만난 뤼전위는 세상에 엉터리 소문이 얼마나 많은지를 실감했다. 리다는 펑위샹의 초청 따위는 관심도 없었다. 옌안에 갈 의향이 있는지를 묻자 고개를 끄덕였다. “원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 밥 한 그릇이면 족하다. 그쪽은 먹고살 만하냐?”



뤼전위는 남방국 조직부장 보구(博古·박고)에게 리다가 한 말을 그대로 전했다. 저우언라이가 병 치료차 모스크바로 출발한 직후였다.



보구는 “옌안에 가면 혁명에 투신하는 것이 당연하다. 무슨 놈에 먹는 타령이냐”며 리다가 옌안에 가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리다는 중공 측에서 아무 연락이 없자 구이린(桂林)으로 거처를 옮겼다.



소련에서 돌아와 뤼전위의 보고를 받은 저우언라이는 짜증이 났다. 버럭같이 화를 내며 주먹으로 가슴을 쳤다. “그게 무조건 오겠다는 말이지 뭐냐.”



마오쩌둥의 반응도 비슷했다. 애석해하며 무릎을 쳤다. “맞는 말이다. 역시 리다다. 혁명이 별거냐, 다들 먹고살려고 하는 짓이지….” 속으론 무슨 욕을 했는지 몰라도 한때 중공의 지도자였던 보구에 대한 비난은 자제했다. 서가에 꽂혀 있는 변증법 유물론 교정(辨證法唯物論敎程)과 경제학대강(經濟學大綱), 사회학대강(社會學大綱)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모두 리다의 저서였다. 사회학대강은 열 번을 읽었지만 볼 때마다 내용이 새로웠다.



리다는 이 대학 저 대학 떠돌아다니며 유물주의 철학을 강의했다. 고독은 습관이 된 지 오래였다. 1948년 봄, 중공 화남국(華南局)에서 보냈다는 사람이 편지 한 통을 들고 왔다. 발신인과 수신자의 이름도 없었다. 후난(湖南)성 창사(長沙)에 있을 때였다.



편지를 펼쳐본 리다는 한눈에 마오쩌둥의 글씨를 알아봤다. 남들이 보면 무슨 말인지 모를 암호투성이 같았다. “형님은 우리 회사의 발기인 중 한 사람이다. 사업이 날로 번창 중이다. 속히 와서 경영에 참여하기를 학수고대한다.” 회사는 중국공산당을 의미했다.



리다는 주변 정리를 시작했다. 이듬해 4월 19일 밤, 이불 보따리만 들고 창사를 떠났다. 공산당 지하조직의 보호를 받으며 베이핑(北平)에 도착하기까지 근 1개월이 걸렸다. 4일 후 마오쩌둥과 해후했다. 1921년 7월 말, 중국공산당 창당대회에서 처음 만난 지 28년 만이었다.



그날 밤 마오는 리다에게 “과부생활을 끝내라”며 복당을 권했다. 리다를 자신의 침대에 재우느라 새벽까지 책상에서 서류를 뒤적거렸다. 이튿날 저우언라이, 류샤오치(劉少奇·유소기) 등에게 “리다는 수절한 과부다. 공산당을 떠났지만 한결같이 우리를 지지했다”며 입당보증인을 자청했다.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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