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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명복의 세상읽기] 제2의 북방정책 필요하다

중앙일보 2011.06.29 00:25 종합 33면 지면보기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북방(北方)의 도전과 중원(中原)의 응전. 그 끝없는 반복이 중국의 역사다. 드넓은 초원에 자리 잡은 북방 민족들의 유목문화와 황허(黃河) 유역에 뿌리를 둔 한족의 농경문화 사이의 충돌과 융합 과정이 중국 역사였다. 흉노, 돌궐, 거란, 말갈, 여진, 몽골, 만주족 등 이름은 달라도 북방 민족들은 하나같이 경제적 풍요와 문화적 상승을 꿈꾸며 지칠 줄 모르고 중원의 문을 두드렸다. 북방의 침략에서 나라를 지켜내는 것은 역대 한족 왕조의 일관된 고민이자 존망(存亡)의 열쇠였다. 만리장성 2700㎞는 북방 민족에 대한 한족의 노이로제를 상징한다.



 지난주 말부터 중국 동북지역을 돌아보면서 새삼 절감하는 것은 북방의 광대함이다. 막연히 넓다고 생각하는 것과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광대함은 다르다. 지린(吉林)성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창춘(長春)∼훈춘(琿春) 간 고속도로. 총연장 588㎞의 이 도로를 시속 100㎞로 달리고 달려도 양 옆으로 초록색 초원과 삼림이 끝없이 이어진다. 까마득한 지평선 위로 펼쳐진 대평원의 파노라마. 씨만 뿌리면 뭐든 잘 자랄 것 같은 비옥한 대지. 빛나는 초여름 태양의 축복. 황량한 만주 벌판의 이미지는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









[일러스트=강일구]






 1949년 중국 건국 이전까지 만주라고 불렸던 이 광활한 지역은 랴오닝(遼寧)성, 지린성, 헤이룽장(黑龍江)성 등 동북 3성을 가리킨다. 한반도의 약 4배 면적(79만㎢)에 달하는 이 땅에 1억600만 명이 살고 있다. 중국 전체 옥수수와 콩의 30%, 밀가루의 13%가 이곳에서 생산된다. 각종 지하자원과 산림자원의 보고(寶庫)이기도 하다. 개혁·개방 이전 중국 최대 중공업지대였던 만주는 동남해안지대가 새로운 공업 중심으로 부상하면서 상대적 낙후를 면치 못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달라지고 있다. 만주가 기지개를 켜고 있다.



 대표적인 프로젝트가 ‘창지투(長吉圖) 계획’이다. 지린성 수도인 창춘과 옛 수도인 지린, 그리고 두만강변의 투먼(圖們)을 일직선으로 연결해 만주의 대대적 공업지대로 육성한다는 계획이다. 이 계획의 실현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동해 진출이다. 만주에서 철도나 육로를 거쳐 랴오닝성 남단의 다롄(大連)을 통해 해상으로 이어지는 물류 노선은 이미 포화상태인 데다 경제성이 떨어진다.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가 동해 해상로다. 지린성 동쪽 옌볜(延邊)조선족자치주의 주요 공업도시인 투먼 또는 훈춘에서 나진·선봉이나 청진 등 북한의 무역항을 통해 동해로 연결하면 물류 비용과 시간을 대폭 절감할 수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지난달 방중을 계기로 본격화하고 있는 북·중 경협의 핵심 포인트가 이것이다. 압록강변의 북한 땅인 황금평 특구 개발과 맞바꾸는 형태로 중국은 나진·선봉과 청진을 통한 동해 진출권을 획득했다. 훈춘과 나선 특구를 잇는 도로의 개·보수 공사가 이달 초 착공됐고, 투먼과 청진을 잇는 철로의 개·보수 공사도 진행 중이다.



 두만강 끝자락에 자리 잡은 중국의 변경촌 방천(防川). 망해각(望海閣)에서 내려다보면 북한, 중국, 러시아 3국이 한눈에 들어온다. “세 나라의 닭 울음소리를 한꺼번에 들을 수 있는 곳”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두만강을 경계로 이어지던 북한과 중국의 국경은 방천에서 갑자기 끝난다. 동해까지 남은 나머지 두만강 구간은 러시아와 북한이 나눠 갖고 있다. 두만강 끝에서 중국이 막혀 있는 꼴이다. 그래서 중국은 북한을 통한 동해 진출을 호시탐탐 노려왔다. 그 꿈이 마침내 이뤄지게 된 것이다. 중국의 동해 진출은 경제적 차원을 넘어 전략적 함의를 갖는다. 동해를 왕래하는 중국 선박의 보호는 결국 군사적 문제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러시아와 일본이 바짝 긴장하고 있다.



 고조선, 고구려에서 발해에 이르기까지 한민족의 강역(疆域)이었던 만주는 역사적으로 동북아 변동의 진원지였다. 만주의 경제적·전략적 가치에 눈독들인 러시아와 일본은 전쟁까지 벌였다. 북방 노이로제를 안고 있는 중국으로선 만주의 안정은 사활적 이해가 걸린 문제다. 중국 정부가 동북 3성 개발에 열을 올리는 이유다.



 문제는 한반도다. 중국 입장에서 한반도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이다. 뇌관은 동북 3성을 중심으로 중국에 살고 있는 220만 명의 조선족이다. 한반도 통일 국면에서 이들과 남북한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는 만주의 안정과 직결된다. 뇌관을 제거하기 위한 중국의 사전 정지작업이 역사를 왜곡하는 동북공정이다.



 만주의 안정을 위협하는 한반도 통일은 불가능하다. 창지투 계획 등 만주의 안정을 위한 중국의 노력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중국의 신뢰를 얻어야 한다. 그것이 정체성의 혼란 속에 부유(浮遊)하고 있는 조선족을 안정시키는 길이며, 한국 기업들의 경제적 이익에도 도움이 되는 길이다. 동시에 중국의 동해 진출에 따른 동북아 질서의 변화 가능성에도 대비해야 한다. 남북관계 개선 없이는 어려운 일이다. 20년 전 첫 번째 북방정책이 중국과 러시아를 겨냥했다면 제2의 북방정책은 만주를 겨냥해야 한다. 전략적 안목으로 제2의 북방정책을 준비해야 한다. 이미 늦었는지 모른다. <중국 창춘에서>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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