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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우덕의 13억 경제학] ‘Boom vs Doom Ⅳ’

중앙일보 2011.06.27 10:04
오랫만에 칼럼 올립니다. 우리는 앞 칼럼 'Boom vs Doom Ⅲ'에서 대표적인 자유주의 성향의 경제학자 천즈우(陳志武)교수를 인터뷰했습니다. 그의 말은 다소 과격합니다. 집권자들이 듣기에 거북할 수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중국 경제학계의 주류를 형성하고있는 우파 경제학자들은 누구일까요. 어느 경제학자의 인생 여정을 통해 들여다 보겠습니다.


중국경제 콘서트(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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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대학교에 광화(光華)관리학원이라는 경영대학원이 있다. 석박사를 배출하는 경영대학원이다. 지난 해 말 이곳에서 중국 경제학계를 흔들 빅 뉴스가 터졌다. 장웨이잉(張維迎)원장이 물러난다는 소식이었다. 관련 기사가 쏟아졌다. 그 중 '장 원장 사퇴 내막'이라는 제목의 보도도 있었다.



내용은 이랬다.



"장 원장의 자유주의적 성향에 부담을 느낀 대학(정부)측이 그를 사퇴시켰다. 장 원장은 며 칠 전까지만 해도 2011년도 광화관리학원의 새로운 운용방안을 얘기할 정도로 애착을 보였다. 자의적으로 떠나지 않았다는 얘기다. 학계에서는 이번 '사건'을 두고 자유주의 경제학파의 퇴조라고 말하기도 한다."







도대체 왜 그런 뉴스가 나왔을까?

경제학계의 기류변화란 무엇을 말할까?



1984년 중국에는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1978년 말 시작된 개혁개방은 농촌을 거쳐 도시지역으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개혁개방의 무게중심이 도시 쪽으로 이동한 것이다. 백화제방, 백가쟁명(百花齊放 百家爭鳴)! 전국의 내로라하는 학자들이 개혁개방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발표하게 된다.



그 해 9월 쩌장(浙江)성 모간산(莫干山). 이 곳 한 휴양지에 150여 명의 청년들이 모였다. 서로가 서로를 몰랐다. '경제일보'의 공고를 보고 경제 관련 논문을 써 냈고, 그 논문이 통과됐으니 9월3일 모간산으로 오라는 통보를 받았을 뿐이다. 산상(山上)학회가 열렸던 것이다. 중국에서 처음으로 이뤄진 전국 규모의 경제학 세미나였다. 흔히 '모간산회의'라고 한다. 중국에서 '경제학계'라는 말이 태동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이기도 했다.



참석자 모두 30대의 젊은 경제학도였다. 최고 수준의 전문가였다. 접수된 논문 중 최고의 작품만을 뽑아 선정했으니 말이다. 현 부총리 왕치산(王岐山), 중국인민은행행장 저우샤오촨(周小川), 중국투자공사(CIC)회장 로지웨이(樓繼偉), 베이징대학 국가발전연구원 원장 저우치런(周其仁)등도 눈에 띄었다. 중국개혁기금회 국민경제연구소 부소장인 왕샤오루(王小魯)역시 멤버였다. 당시 모간산회의에 모인 경제학도들이 지금까지 중국 경제를 이끌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만큼 중요한 회의였다.



25살 약관의 나이에 이 회의에 참석한 청년이 있었다. 산시(陝西)사투리를 진하게 쓰는 촌뜨기였다. 테이블 한 편에 앉아 회의 내용을 정리하던 청년 경제학자, 그가 바로 장웨이잉이었다. 그는 모간산 회의에서 논문도 발표했다. 이중가격제를 기반으로 한 가격개혁 방안이 주제였다.



당시 도시개혁의 핵심은 가격이었다. 정부가 가격을 통제하는 시스템으로는 생산력을 끌어올릴 수 없었으니 말이다. '가격을 완전히 시장에 맡겨야 한다'는 게 장웨이잉의 주장이었다. 방법은 '이중 가격제'였다. 과도기로 정부고시가격과 시장가격 등 두 가격을 모두 인정하자는 얘기다. 중국어로는 '쌍궤제(雙軌制)개혁'이라고 한다.



"도로를 보수할 때 임시 도로를 만들어 소통을 하게 한다. 도로 보수가 끝나면 임시 도로는 폐쇄하고 새 도로를 활용한다. 마찬가지로 시장 가격이 자리잡을 때까지 도로(가격)을 두개 만들자는 것이다."



장웨이잉은 자신의 생각을 다소 과격한 투로 설명했다. 획기적인 생각이었다. 중국 지도부가 그의 주장에 귀를 기울였고, 그의 주장은 결국 정책으로 채택됐다. 중국은 80년대 후반 부터 주요 물자에서 이중가격제를 실시했다. 학교 도서관에 박혀있던 '장웨이잉'이라는 인물이 사회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게 바로 이 때다. 장웨이잉은 그해 말 저우샤오촨 로지웨이 등과 함께 개혁개방의 밑그림을 그리던 중국체제개혁위원회에 들어갔다. 관료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장웨이잉 주장의 핵심은 언제나 '시장'이었다. 분배 기능을 시장에 맡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시장'과 만난 것은 23살(1982년)때였다. 당시 고향 시안(西安)의 시베이(西北)대학에 다니던 그는 아담스미스의 자본론을 읽게 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신주단지 모시듯 배우던 시절이었다. 천재 경제학도에게 '보이지 않는 손'은 충격이었다. 그는 시장경제에 더 깊게 빠져들게 된다. 자유주의 시장경제를 신봉하는 우파 경제학자는 이렇게 만들어지고 있었다.



이듬해에는 일간지 '중국청년보'에 '돈의 옳바른 이해(爲錢正名)'라는 글을 쓰기도 했다. '금전이라는 신분과 기능은 긍정적인 요소가 많다'라는 결론이었다. 비난이 들끓었다. '배금주의자', '마오쩌둥의 사상을 오염시킨 자'라는 지탄을 받았다. 그는 굴하지 않았다. 1984년 베이징으로 올라온 그는 또다른 시장주의 경제학자인 마오위스(茅于軾)교수를 만나 학문의 깊이를 더하게 된다. 이 과정을 통해 그는 모간산 회의에 참석했고, 체제개혁위원회 근무의 행운을 잡게 된 것이다. 중국 지도부가 그의 사고를 받아들였다는 얘기다.



1980년대는 그랬다. 온갖 사상과 사고가 모두 분출되는 시기였다. 지식인들은 '어떻게 하면 중국의 현대화를 앞당길 것인가'를 놓고 씨름했다. 덩샤오핑이 주도하는 개혁개방에 모두 동참했던 것이다. 마오쩌둥 시기에 억눌렸던 지식인들의 사고가 분출됐다. 당연히 자유주의적 사고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마오위스 교수는 '당시 우리 모두는 자유주의 시장학파였다'라고 말한다.



1989년 6월 천안문 사태가 터졌다. 지식인들은 천안문 광장을 피로 물들인 탱크를 봐야 했다. 좌절이었다. 그들은 흩어진다. 일부는 장사의 길로 접어들고, 일부는 지방으로 내려가고, 또 일부는 해외로 유학을 떠났다. '중국은 어디로 갈 것인가', 지식인들은 방향을 잃었다...



장웨이잉이 선택한 길은 해외 유학이었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으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노벨상 수상자였던 제임스 미르리스(James Mirrlees)교수를 만나게 된다. 산업조직과 기업발전을 연구했다. 1994년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다시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베이징 대학에서 둥지를 틀었다.



당시 중국은 장쩌민/주룽지 시대였다. 덩샤오핑의 남순강화 이후 중국은 다시 개혁개방의 기치를 높게 들고 있었다. 1993년 11월 14기3중전회에서는 '사회주의 시장경제'노선이 채택되기도 했다. 지도부는 개혁개방을 추동할 새로운 지식인 그룹이 필요했다. 해외에 나가있던 학자들이 돌아올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된 것이다. 90년대 중반 천안문 사태 직후 해외로 떠났던 많은 해외 유학 학자들이 대거 귀국하게 된다. 그들의 머리에는 서구 자유주의 사상이 충만해 있었다.



해외 유학파들은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던 우징롄, 리이닝, 마오위스 등 원조 시장파 학자들과 다시 만나게 된다. 왕치산 로지웨이 등 관계에 진출해있던 옛 동료들과도 교류를 늘려갔다. 시장파 경제학자들은 학계와 관계를 하나하나 접수하기 시작했다. 이들 덕택에 1990년대 중국 경제계에는 자유주의 사조가 활발하게 타오르게 된다.



그들의 주장은 '시장에 맏겨라'는 것이다. 정부는 간섭을 줄이고, 국가의 부를 민간으로 풀라는 주장이다. 국유기업을 과감히 민영화하는 한편 민영기업에 대한 족세를 풀라고 강조한다. 한마디로 '국퇴민진(國退民進)'이다.



대표적인 시장파 경제학자로는 우선 우징롄을 꼽을 수 있겠다. 덩샤오핑에게 개혁개방의 이론적 틀을 제시해준 인물이다. 이밖에 해외에서 공부한 린이푸, 저우치런, 마오위스, 쉬샤오넨, 런즈챵, 장웨이잉 등이 서구 자유주의 경제학을 중국에 옮겼다. 지난 칼럼에서 보았던 천즈우는 장웨이잉과 절친한 관계로 역시 자유주의 경제학파의 주요 인물 중 한 명이다.(위 왼쪽부터 시계방향, 우징렌, 마오위스, 린이푸, 저우치런,런즈챵, 천즈우, 장웨이잉, 쉬샤오넨)







그들이 건들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바로 정치다. 그들은 공산당 권위주의 체제를 인정했다. 체제 내에서 경제 개혁을 이뤄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곧 시장파 경제학자들이 권위주의 공산당과 손을 잡았다는 얘기가 된다. 공산당은 흔들리지 않는 권위를 유지했다. 대신 경제는 자유주의 사조가 완연했다. 그 과정에서 나온 게 바로 '3개대표'다. 노동자.농민뿐만 아니라 자본계급(기업가)도 공산당에 가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90년대 중국 경제학계는 자유주의의 전성시대라고 할 만했다.



그런데 2000년대 들어 새로운 분위기가 형성된다. 이들 주류 시장파 경제학자들을 공격하는 새로운 학파의 경제학자들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그들은 '신좌파'라고 했다. 장웨이잉이 광화관리학원 원장에서 물러나게 된 것 역시 그들과 관련이 있다는 분석이 제기되기도 한다.



신좌파, 그들은 누구일까?



請看下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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