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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진의 서핑 차이나]유상(儒商)의 산실 휘주상방(徽州商幫)

중앙일보 2011.06.27 09:46
사상삼투(士商渗透)란 말이 있다. 글 읽는 선비가 장사치가 되고, 장사치 역시 선비가 되기도 한다는 말이다. 선비와 상인 사이의 칸막이 무용론인 셈이다. 특히 ‘자본주의 맹아론’ 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경제가 발달했던 중국 명(明)나라 말기에 널리 퍼졌던 말이다. 사상삼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던 곳이 강남의 휘주(徽州) 지방이었다. 유상(儒商)으로 불리던 휘주상인들은 공자의 ‘논어’ 첫 마디를 원용한다면 ‘학이시습(學而時習)’이 아닌 ‘상이시습(商而時習)’에 힘썼다. 상인이면서 훌륭한 유학자를 뜻하는 ‘고이호유(賈而好儒)’가 그들의 모토였다.


중국 상방(商幫) 탐방②

◇와호장룡의 무대이자 후진타오의 고향

휘주는 풍경이 수려한 황산(黃山) 아래이면서 신안강(新安江) 상류 지역에 위치한다. 진(秦)나라 때 이곳에 서(歙·흡)현과 이(黟·이)현을 설치하면서 제국의 행정구역에 편입됐다. 한(漢)나라 때 신도군(新都郡), 진(晉)나라 때 신안군(新安郡)을 거쳐 송(宋)나라 시절 휘주로 정착됐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는 안후이(安徽)성 황산시에 속하는 서현, 슈닝(休寧·휴녕)현, 이현, 치먼(祁門· 기문)현과 이청(宜城)시에 속하는 지시(績溪·적계)현, 장시(江西)성 우위안(婺源·무원)현까지 도합 여섯 개 현이 휘주에 속한다.



이곳은 상인문화뿐만 아니라 성리학·의학·건축·회화·연극 등 각종 중국 문화의 전형이 응축된 고장이다. 특히 이곳에서 발견된 ‘휘주문서’는 갑골문, 한대 죽간, 돈황문서, 고궁의 명청당안(明淸當案)과 함께 중국 5대 문서자료로 불린다. 특히 리안(李安) 감독의 영화 ‘와호장룡’의 고색창연한 무대가 바로 휘주다.



휘주가 배출한 역사적 인물은 무수히 많다. 유학의 대가 주희(朱熹), 국학자 호적(胡適)을 비롯해 현재 중국 최고지도자인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도 휘주 지시현 태생이다.



지리적으로 휘주는 경작 가능한 토지가 적고, 신안강을 이용하면 경제적으로 발전한 강남 델타지역까지의 교통이 편리했다. 게다가 이곳에는 문방사우로 불리는 종이·붓·먹·벼루의 재료가 되는 목재와 석재 등 특산품이 풍부했다. 농사보다 장사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고, 유통할 물자가 풍부했다. 산서상방과 마찬가지로 휘주상방도 명나라 중엽 강남지역에서의 소금유통을 독점해 부를 쌓았다. 이후 유통업과 가공업, 금융업 및 식당 경영으로까지 활동영역을 크게 넓히면서 거대 상방으로 성장했다.



◇상성 호설암과 그 후예들

대표적인 휘주상인은 상성(商聖)으로 불리는 청말의 호설암(胡雪巖)이다. 호설암은 큰 장사를 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 “작은 장사를 하려면 상황에 순응하면 되지만, 큰 장사를 하려면 먼저 나라의 이익을 생각해야 한다.” “관리든 상인이든 모두 사회적인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관리가 되어도 ‘탐관(貪官)’이 되고 상인이 되어도 ‘간상(奸商)’이 되기 쉽다”며 나라와 공익을 위한 사업을 할 때 성공이 따라온다고 믿고 그대로 실천했다. 호설암은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읜 그는 열 두 살의 나이에 홀어머니를 떠나 항저우(杭州)의 전장(錢莊)에 수금사원으로 들어갔다. 어느 날 그는 결손 처리된 은 500냥을 왕유령(王有齡)이란 인물에게 ‘투자’했다. 이 일로 호설암은 전장서 쫓겨났지만 왕유령은 훗날 저장(浙江)성 최고관리가 되어 돌아와 호설암의 후견인이 됐다. 그는 돈보다 사람에 투자할 때 큰 이익을 거둔다는 비결을 알고 있었다. 왕유령과의 만남은 호설암이 훗날 고위관리와 상인을 겸한 ‘홍정상인(紅頂商人)’으로 성장하는 기반이 됐다.



휘주상방의 전통은 지금도 이어져 내려온다. 중국 토종 자동차 메이커인 치루이(奇瑞)자동차의 인퉁야오(尹同耀) 회장은 대표적인 휘상의 후예다. 독자 브랜드가 약한 중국에서 그는 ‘민족 브랜드의 기수’로 통한다. 외국 회사와의 합작을 거부하고 독자 브랜드만을 생산하는 정책을 취했기 때문이다. 그는 허페이(合肥) 대학에서 자동차공학을 전공한 뒤 중국 최대 자동차 회사인 창춘 이치(一汽)의 엔지니어로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인퉁야오는 1996년 안후이 성정부의 중점 프로젝트였던 치루이 창업과정부터 함께했다. 그는 합류 8년 만인 2004년 회장 겸 총경리에 올랐다. 초창기 치루이는 외제차의 짝퉁만 만든다는 비판에 시달렸다. 하지만 중국 자동차 메이커 최초로 해외 수출에 성공했고 초단기 100만대 생산기록도 수립했다. 해외진출 성공의 밑바탕이 된 치루이의 기업 이념은 창신(創新)·경업(敬業)·성신(誠信)·근검(勤儉)·염결(廉潔)·화해(和諧)이다. 이는 휘상의 전통적인 상업 윤리와 일맥상통한다.



◇유교 도덕을 강조한 휘상의 상업 윤리

청나라의 건륭제는 “부유하도다, 휘주 상인들이여, 짐도 그대들에게 미치지 못하노니!”라고 휘상의 부유함에 감탄했다. 휘상은 어떻게 황제도 부러워할 부를 쌓는데 성공할 수 있었을까? 그들이 믿고 따랐던 상업윤리가 성공의 비결이었다. 다음은 휘주상방의 상업윤리다.



첫째, 이성대인(以誠待人)이다. 고객을 성실하게 대하고 속이지 않았다. 이를 통해 고객의 믿음을 얻었다. 동업자와 고용인을 대함에도 성의를 최고의 미덕으로 여겼다.



둘째, 이신접물(以信接物)이다. 신용 제일주의이다. 신의가 없으면 거래를 하지 않았다. 기근이 든 해일지라도 질 낮은 미곡으로 폭리를 탐하지 않았다. 그들은 믿음으로 장사했다.



셋째, 이의위리(以義爲利), 의(義)로서 이(利)를 추구했다. 공자의 “군자는 의를 구하고 소인은 이를 구한다”는 말을 따랐다. 중국의 전통적인 억상(抑商)정책은 공자의 이 말에서 나왔다. 휘주상인들은 ‘이의위리’로 상행위의 핸디캡을 극복했다.



넷째, 인(仁)을 중시했다. 자연재해가 발생해 미곡 가격이 급등하더라도 저장한 쌀을 빈민에게 무이자로 대여했다. 인을 베풀어 명성을 얻었다.



다섯째, 근검(勤儉)을 강조했다. “부지런함이 재산 증식의 원천이며, 검소함이 재산 절약의 흐름이다. 집안을 일으키는 도리는 실로 이것(부지런함과 검소함)이 근본이다.” 휘주 개사왕씨(開沙王氏) 족보의 가훈 첫머리에 나오는 말이다. 근검은 휘상의 미덕이었다.



여섯째, 인화(人和)다. 장사는 결국 사람 사이의 일이며, 사람 사이의 일은 조화와 화합이 최선이라고 그들은 믿고 따랐다. 그리고 성공했다.

신경진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연구원 xiaokang@joongang.co.kr





※이글은 포스코경영연구소에서 펴내는 '[친디아저널] vol.58 (2011.06)'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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