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삶과 경영] 제 2화 금융은 사람 장사다 (28) 에필로그

중앙일보 2011.06.17 02:57 경제 9면 지면보기






삼성경제연구소 CEO 과정에서 사진을 배운 윤병철 회장에게 빛이 그리는 그림을 포착하는 일은 소중한 취미활동이다. 여행할 때면 그는 꼭 세상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해주는 카메라를 챙겨 간다. 지난해 여름 백두산 천지에 올라 자연이 주는 선물을 마음껏 카메라에 담았다.





나는 참 운이 좋은 사람이다. 좋은 분들을 만나 좋은 일을 할 기회와 여건이 마련돼 뜻 있는 일에 참여할 수 있었다. 버나드 쇼는 묘비명에 “우물쭈물하다가 이럴 줄 알았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나는 아마 이렇게 남길 것이다. “좋은 사람 숲에서 행복하게 살다 갔다.”



 국내 첫 민간금융회사인 한국개발금융을 만드는 데 운 좋게도 역할을 할 수 있었다. 또 단자회사이던 한국투자금융을 구성원들의 힘을 모아 하나은행으로 만들었다. 국내 최초의 금융지주사의 기틀을 다지는 일도 했다. 지구상에 68억 명의 인구가 있는데 모두가 공평하게 산다면 내가 할 몫은 68억분의 1이면 된다. 그런데 나는 그보다 몇백 배 더 일할 기회를 얻었다. 그게 내 행복이다.



 하나은행이 출범할 때 직원들에게 얘기한 게 있다. “나중에 나이가 들어 손자와 길을 갈 때를 생각해 봐라. ‘할아버지는 어디 다니셨느냐’고 물을 때 ‘저기, 제일 큰 빌딩에 있는 회사에 다녔다’고 하는 게 낫겠나, 아니면 ‘요즘엔 어디 있는지 잘 모르겠다’고 하는 게 낫겠나. 우리가 그런 것을 하나 남기자.” 지금 하나은행이 그 이름 그대로 가고 있으니 그게 또 반갑고, 대견하고, 자랑스럽다.



 한국투자금융 시절부터 구성원들에게 강조한 정신이 ‘자주’다. 그리고 주인 노릇을 하려면 자율과 진취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자주, 자율, 진취. 그 정신이 있어야 어떤 조직도 앞으로 나갈 수 있다. 우리나라 금융이 그렇게 나아갔으면 참 좋겠다.



 최근 우리금융지주 민영화를 둘러싼 논란을 보면서 아쉬운 점도 그 점이다. 어느 금융그룹이 어느 금융회사를 인수하느냐 하는 문제보다 먼 앞날을 내다보고 안정되고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지배구조를 확립하는 일이 더 급선무라고 생각한다. 민영화의 롤 모델이 될 만한 변변한 금융회사가 우리나라에 없기 때문이다. KB금융지주나 신한금융지주는 내부에서 분란이 일어났다. 또 새 정부가 들어서면 지주회사 최고경영자들이 대거 바뀔 거란 추측마저 나돈다. 주식이 전부 민간에 있는 금융지주사인데도 정부가 회장 인사를 좌지우지할 거라는 관측이 일반적이다. 그렇다면 정부가 은행장을 임명하던 제3 공화국 때와 뭐가 다르겠는가.



 어쩌면 정치보다는 차라리 관치가 나을지도 모른다. 관치와 달리 정치는 책임지는 사람조차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이 어떤 때는 참 서글프다.



 예전에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 세 가지가 뭐냐는 질문에 건강, 명예, 그리고 그걸 지켜줄 돈이라고 답했다. 건강과 명예는 자기가 아니면 관리를 못 하지만 돈 관리는 남에게 시킬 수 있다. 그 일을 해주는 사람이 바로 금융인이다.



 옛날도, 요즘도 은행원은 월급이 많다. 많은 월급을 주는 건 고객이 안심하고 돈을 맡길 수 있는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신뢰가 없다면 금융은 성립할 수 없다. 과연 지금 금융인들이 그런 자세를 갖추고 있는지 묻고 싶다. 금융은 사람이다. 그게 기본이다.



 살아온 인생을 돌이켜보면 아쉽고 안타까운 순간도 있다. 2010년 사회복지공동모금회 회장을 맡았던 때가 그렇다. 나눔이야말로 우리 사회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중요하다고 여겨 모금회 일에 참여하게 됐다. 나로선 좋은 경험이고 멋있게 봉사하고 싶었다. 하지만 내부 감사에서 직원들의 비리가 확인됐고, 이것이 국정감사를 통해 알려지면서 물의를 빚었다. 선의로 나눔을 실천하는 기부자들에게 걱정을 끼쳤다는 게 두고두고 가슴이 아프다. 나를 비롯한 임원진이 전원 사퇴하면서 환골탈태하는 모습을 보이고자 했다. 모쪼록 이 일로 인해 나눔에 대한 사회의 관심이 꺾이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하나은행장으로 일하던 때 대학생의 편지를 받은 적이 있다. “4학년이 됐는데, 사회에 나가서 성공적인 삶을 살고 싶다. 조언을 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때 내가 이렇게 답했다. “지금 네 주변에 있는 사람이 성공한 사람이라고 해서 그걸 따라 한다면 절대 성공할 수 없다. 조용히 자신의 내면에서 우러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잘하는 게 뭐냐, 하고 싶은 게 뭐냐, 하면 즐거운 게 뭐냐. 그걸 목적으로 세우고, 저 산을 올라간다는 마음으로 한 걸음씩 걸어가라. 가다 보면 골짜기도 있을 거다. 구경은 하되 목적을 잊고 거기 주저앉으면 산에 올라가지도 못하고 내려온다. 또 무조건 올라가다가 발에 쥐가 나면 정상까지 가지 못한다. 즐기면서 한 발짝씩 올라가서 더 오를 곳이 없다면 정상이고 그게 성공이다.”



 나 역시 그렇게 한 발짝씩 올라 지금에 이르렀다. 모든 것이 그 길 중간중간에 좋은 인연으로 만난 소중한 사람들 덕분이다.



윤병철 전 우리금융 회장

정리=한애란 기자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