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노트북을 열며] 한 번의 식사 자리가 ‘악마의 덫’이다

중앙일보 2011.06.15 00:30 종합 34면 지면보기






권석천
사회부문 차장




만약 당신이 돈 봉투 받는 데 이골이 난 사람이라면, ‘좀 받는 게 어때서. 그런 게 사회생활 아니야?’ 하고 생각한다면 굳이 이 글을 읽을 필요가 없다. 이 글은 공적인 직업 윤리와 사적인 인간관계 사이에서 고민하는 이들에게 드리는 충고이자 경고이기 때문이다.



 요즘 검찰청 포토라인에 서는 공직자들이 줄을 잇는다. 능력을 인정받아온 엘리트들이다. 재계에서도 기업 내부의 부패에 대한 문책 바람이 매섭다. “일 잘하는 사람인데…” “이상한 돈 받을 사람은 아닌데…” 안타까움에 혀를 차는 소리가 무성하다. 깨끗한 처신으로 주목받던 그들이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전락의 과정을 몇 단계로 나누어 따라가 보자.



 ①한 번의 식사: 지인의 소개로 문제의 인물(정체불명이란 의미에서 ‘X’로 부르기로 한다)과 점심이나 저녁을 함께 한다. ‘세상 돌아가는 걸 알아야 제대로 정책 결정(기업 경영)을 할 것 아니냐’는 마음에 나가는 자리다. X는 대개 멀쩡한 사업가 명함을 들고 있다. 스스로를 브로커라고 소개하는 바보는 없다. ②교제: 한두 번 만나다 보면 술자리나 골프로 이어진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 X와의 만남이 유쾌하다. ③봉투: X가 “부담 갖지 말고 회식하실 때 쓰시라”며 봉투를 내민다. “이런 걸 왜?” 손사래를 치고 짐짓 화도 내보지만 눈먼 돈의 마력은 뿌리치기 힘들다. ④청탁: 처음엔 X도 당연히 될 일을 부탁한다. ‘내가 아니어도 해줄 일’이다. 죄의식이 엷어지는 사이 청탁의 덩치는 점점 커진다. ⑤만남의 끝: 엉뚱한 곳에서 수사가 시작된다. 식사 스케줄이 적힌 X의 다이어리가 검찰에 넘어간다. 끝까지 침묵을 지켜 주리라 믿었던 X가 입을 연다. 어느날 검찰에서 소환 통보가 오고, 삶 전체가 불명예 속으로 가라앉는다.



 오랜 기간 비리 사건을 수사해온 검사나 변호사들의 설명을 종합한 결과다. “결국은 한 번의 식사 자리에서 모든 게 시작된다”는 지적이다. 고법 부장판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사람을 가려서 만나고, 자리를 골라서 앉는 분별력을 잃으면 안 된다”고 말한다. “돈만 안 받으면 될 것 아니냐”고 할 수도 있지만, 그런다고 문제가 생기지 않는 게 아니다. ①이나 ②단계에서 멈췄더라도 브로커가 “식사 자리에서 ○○○씨에게 돈을 줬다”고 뒤집어씌우기도 한다. 중간에 배달 사고를 냈거나 진짜 보호해줄 사람을 위해서다. 밥 한 끼 한 것을 두고 “호형호제 관계”라며 범죄에 활용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인생의 마지막 뒷모습을 망쳤다. 악마의 덫에 걸려 빠져나가기 힘들 듯하다. 모두 내가 소중하게 여겨온 ‘만남’에서 비롯되었다.”



 임상규 순천대 총장(전 농림부 장관)이 남긴 유서가 가슴을 친다. 흠 하나 없이 공직자의 길을 걸었던 그로선 검찰 수사를 받는 상황 자체가 견디기 힘든 치욕이었을 것이다.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악마의 덫’은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 그 덫에 당신과 가족의 운명을 맡길 것인가. 오늘 점심, 저녁에 누구와 마주 앉느냐가 인생의 갈림길이 될 수도 있다.



권석천 사회부문 차장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