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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청춘은 맨발이다 (38) 이봉조와 현미

중앙일보 2011.06.15 00:28 종합 27면 지면보기



“형, 맞아야 정신차리겠어” 이봉조를 노려봤다



1972년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연예인축구대회에 참가한 신성일(왼쪽)이 이봉조와 함께 손을 번쩍 들고 있다. [중앙포토]



가까이 지내면서도 안타깝게 여기는 커플이 있다. 작곡가 이봉조(1931~87)와 가수 현미(73)다. ‘맨발의 청춘’(1964)에서 그들과 첫 인연을 맺었다. 이봉조는 최희준이 부른 ‘맨발의 청춘’ 주제가를 작곡하며 입지를 굳혔다. 이어 현미의 ‘보고 싶은 얼굴’ ‘떠날 때는 말없이’, 최희준의 ‘종점’, 정훈희의 ‘안개’ 등 주옥 같은 곡을 발표하며 전성기를 맞았다.



 내가 본 이봉조는 천재였다. 작곡가들은 즉흥곡을 만드는 경우가 많은데, ‘맨발의 청춘’이 그랬다. 촬영 기간이 18일이었지만 작곡할 시간은 더욱 짧았다. 미8군에서 색소폰 주자로 활약했던 그는 촬영 화면을 보고 녹음실에서 색소폰으로 몇 번 ‘빠앙빠앙’ 불다가 주제곡을 완성했다.



 이봉조는 다재다능했다. 한양대 건축과 출신으로 6인조 밴드를 조직해 활동했고, 서예의 달인이었다. 크리스마스와 신정 때 친필로 써 보낸 그의 카드는 하나의 작품이었다.



 현미가 수없이 밝힌 바에 따르면 두 사람은 미8군 공연을 하며 만났다. 이봉조가 유부남이었다는 사실을 안 것은 현미가 임신 7개월에 접어들었을 무렵이었다고 한다. 이봉조는 현미 모르게 두 집 살림을 했다.









가수 현미



 1972년 오일쇼크로 온 나라가 시끌시끌하던 어느 날이었다. 손에 큰 가방 하나 든 현미가 두 아들을 데리고 우리 집(동부이촌동 삼익APT)에 찾아왔다. 큰 아이는 초등학교 6학년, 작은 아이는 4학년이지 않았나 싶다. 사연은 이랬다. 이봉조는 현미를 입적해주겠다고 약속하면서도 그 일을 차일피일 미뤘다. 본처와 헤어지겠다는 말도 지키지 않았다. 그 약속을 믿고 기다린 현미에게 최악의 상황이 찾아왔다. 이봉조의 본처가 아기를 낳았다. 그 소식을 접한 현미는 바로 두 아이를 데리고 창경궁 부근의 원남동 집에서 나왔다.



 살 곳도 없으니 큰 일이었다. 현미의 아들 영근이가 우량아여서 우리는 현미를 ‘돼지 엄마’라고 불렀다. 우린 그 정도로 친했다. 엄앵란은 현미가 가련해서 두고 볼 수 없었다. 마침 동부이촌동 삼익(렉스) APT가 분양 중이었다. 우리는 은행 대출을 받아 아파트 값을 마련해줬다. 순전히 엄앵란의 신용대출이었다. 지금도 현미가 방송에서 엄앵란에게 신세 졌다고 하는 건 이런 배경 때문이다.



 나는 평소 이봉조가 진주 출신의 ‘사나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미와 자식들을 못 본 채 하는 그의 처신은 사나이답지 못했다. 자신의 말대로 본처와 헤어지던가, 아니면 현미와 아이들이 먹고 살 수 있도록 해주어야 했다. 아무리 형이라고 불렀지만 두고만 볼 수 없었다.



 어느 모임에서 이봉조와 마주쳤다. 나는 눈을 부릅뜨고 이봉조를 노려봤다. “형, 왜 그렇게 책임을 못져? 동생한테 맞아봐야 정신차리겠어!” 그가 할 말이 있을 턱이 없었다.



 이봉조는 그 사건 후 나만 보면 피해 다녔다. 그리고 얼마 후인 87년 8월 세상을 뜨고 말았다. 나 역시 현미에게 애처로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 젊은 시절부터 남자의 보살핌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얼마나 고생을 심했을까. 지금도 가방 하나와 두 아이를 데리고 온 그녀의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



신성일

정리=장상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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