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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영의 시시각각] 불확실성의 가치

중앙일보 2011.06.15 00:29 종합 34면 지면보기






김환영
중앙SUNDAY 사회에디터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불확실성도 그 가치가 발휘될 때가 있다. 불확실성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좋은 게 나올 수 있다. 예컨대 자본주의나 우리나라의 초고속 근대화는 어쩌면 불확실성에서 유래한다.



 우선 자본주의의 기원을 보자. 독일의 사회학자·정치경제학자인 막스 베버(1864~1920)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1904~1905)에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폈다. 칼뱅주의의 예정설에 따르면 신(神)은 구원받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이미 결정해놨다. 장로교 신자들을 비롯한 칼뱅주의자들은 이윤 축적과 물질적 성공이 구원받았다는 증거라고 생각했다. 신의 은총을 받았는지 못 받았는지에 따르는 불안감을 해소하는 과정에서 자본주의가 탄생했다. 구원의 불확실성이라는 심리적인 압박감이 긍정적으로 작용한 것이다.



 서양에 ‘구원 콤플렉스’가 있다면 우리나라에는 ‘양반 콤플렉스’가 있다. 대한민국 국민치고 양반 후손 아닌 사람이 없다. 성명(姓名) 중 성(性)을 정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100% 양반이 됐다. 국민 모두가 공식적으로 전통사회의 엘리트 출신이라는 것은 세계적으로 희귀한 경우다. 물론 가짜 양반이 많이 섞여 있었다. 전통사회 붕괴 이후 새로운 세상에서 누가 ‘양반’의 지위를 새로 획득하거나 유지할지 불확실했다. 가짜 양반, 진짜 양반 모두에게 기회가 열렸다.



 과거제 폐지로 국가와 유교의 연결고리가 사라지고 공자 왈 맹자 왈이 일순간에 휴지 조각이 됐지만 양반과 상놈을 구분하는 의식구조는 남았다. 사(士)자가 들어가는 직업을 선호하고 공부도 가능하면 많이 하는 문화가 형성됐다. 다른 일을 하다가도 국회의원이나 장관 등 공직에 나서는 것은 우리 문화에서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연예인들은 스스로를 공인(公人)이라고 생각한다.



 불확실성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가능하면 불확실성을 줄이려고 한다. 칼뱅주의자들의 청빈 정신이나 우리의 엄청난 교육열은 불확실성이 긍정적인 수단으로 해소된 경우다. 불확실성을 극복하려는 시도가 전체 공동체에는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경우도 있다. 정당들은 정권 재창출이나 탈환을 둘러싼 불확실성을 통제하고자 장밋빛 공약부터 하고 본다. 저축은행 사태나 기업 내 부정부패도 그 본질은 미래에 들이닥칠 불확실성을 줄이려는 데서 출발한다고 볼 수 있다. 로스쿨·의학전문대학원·외교아카데미 등 새로운 전문가 양성 방식도 운영이 잘못되면 사회 지도계층에 속한 사람들이 후손에게 덜 불확실한 미래를 마련해 주는 수단으로 전락할 수 있다.



 대학은 불확실성을 없애려는 시도가 가장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는 현장 중 한 곳이다. 그러나 대학 졸업장은 미래 불확실성을 줄이는 데 예전과 같은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미국 대학의 현실을 봐도 그렇다. 우리와 닮은꼴이다. 아이비리그 대학 등 명문 대학을 나와도 취업이 보장되지 않는다. 웬만한 사립대를 졸업하려면 25만 달러 이상 들어간다. 학부모·학생들이 졸업 후 빚더미에 올라앉게 된다. 미국 대학 관료체제는 비대해지고 드높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교수들은 안식년을 떠나며 그 자리를 메우는 것은 강사들이다. 이런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미국이나 한국의 대학산업은 전체적으로 번창한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불확실성의 시대에는 가까운 과거까지 확실했던 것에 더욱 더 매달리게 되기 때문이다.



 개인이 확실한 것에 매달리다 보면 공동체의 불확실성은 오히려 증가한다. 개인의 불확실성이 사회적으로는 좋은 결과를 낳는다. 우리 사회가 실현하고자 하는 공정성·청렴을 위해 필요한 것은 불확실성이다. 누가 성공할지, 누가 이길지 모르는 불확실성이 전제돼야 공정성·청렴이 가능하다. 공정성·청렴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이를 뒷받침할 법적·제도적 장치도 필요하고 구호나 선언, 운동도 필요하다. 이에 못지않게 필요한 것은 불확실성에서 오는 창조적 긴장감의 가치를 인정하고 기득권이 훼손한 불확실성은 복원하는 것이다.



김환영 중앙SUNDAY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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