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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2권 한꺼번에 낸 박정대 시인

중앙일보 2011.06.15 00:25 종합 27면 지면보기



떠돌다 왔습니다
감성을 나누고 싶어



긴 머리에 덥수룩한 턱수염, 그리고 청바지. 시인 박정대씨는 방랑자 같은 인상을 준다. 그가 낭만주의적인 시집 두 권을 한꺼번에 냈다. 리스본·말라가 등을 찾아 다니는 이국풍의 시집이다. [안성식 기자]



시인 박정대(46)씨가 신작 시집 두 권을 한꺼번에 냈다. 『모든 가능성의 거리』(문예중앙)와 『삶이라는 직업』(문학과지성사). 그답지 않은 덤덤한 제목의 시집이다. 가령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 『아무르 기타』 같은 그의 이전 시집들은 제목에서부터 감상적인 냄새를 물씬 풍겼다. 그에 비하면 이번 시집들은 뭔가 사무적이고 철학적인 느낌이다.



 하지만 시편들은 낭만적인 정체를 금세 드러낸다. ‘청춘 계급’ ‘마 솔리튀드’ ‘러시아 혁명 호텔’ ‘슬라브식 연애’ ‘아직도 전기를 사용하지 않는 나의 지구에서의 차와 담배와 고독 사용법’ 등. 각 시의 제목만 이어 붙여도 이국적이면서도 아련한 그림 한 장이 그려질 정도다. 그 그림 안에서는 아르헨티나 출신 혁명가 체 게바라가 떠받들어지고 스파이의 은밀한 지령처럼 시가 교환되며 순백의 러시아 미녀, 천지사방을 고립무원으로 만드는 폭설 같은 것이 있다.



 ‘흑맥주를 마시는 캄캄한 밤, 강원 내륙 산간 지방에 내린 폭설주의보//바람이 컴컴한 하늘을 끌고 내려와 민박집 처마 끝에 당도했을 때 나는 나타샤의 살결처럼 하얗게 피어날 폭설의 밤을 생각한다, 슬라브식 연애를 생각한다//나는 연애지상주의자, 지상에서 밤새도록 펼쳐질 슬라브식 연애를 생각한다//그러니까 폭설은 사흘 밤낮을 퍼부어야 하는 것이다//그러니까 내가 묵고 있는 민박집의 아리따운 그녀는 세상이 더러워 세상을 버리고 산골로 들어온 고독한 여인이어야 하는 것이다//흑흑, 흑맥주를 마시는 밤은 아주 캄캄하고 추워 지금 내 마음의 내륙에 내려진 폭설주의보’.



 백석의 유명한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흉내 낸 것 같은 ‘슬라브식 연애’는 ‘박정대식 감상주의(感傷主義)’ 가 100%, ‘만땅’으로 충전된 작품이다. 오죽하면 폭설 속 민박집에서 시의 화자는 흑맥주를 ‘흑흑’ 마신다.



 그렇다고 박씨의 낭만주의를 값싼 감상주의로 치부해서는 곤란하다. 문학평론가 김진수씨는 소책자 『우리는 왜 지금 낭만주의를 이야기하는가』에서 낭만주의에 대한 일반의 잘못된 통념을 지적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낭만주의는 대중가요가 환기하는 것처럼 ‘다시 못 올 것’에 대한 아련한 동경과 향수, ‘첫 사랑 그 소녀’에 대한 미련과 그리움, 이국적인 정취, 누추한 현실에 대한 신비화 같은 게 아니다. 오히려 낭만주의는 환상까지 아우르는 상상력,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랑의 힘 등을 통해 세계와 예술을 혁명적으로 바꾸려는 ‘미적인 기획’이다.



 박씨의 이번 시집은 이런 낭만주의론에 고지식할 정도로 충실한 것으로 보인다. 한 잔의 커피, 한 모금의 담배연기에 만족하며 포르투갈의 파두 클럽 같은 곳을 찾아 정처 없이 떠도는 시인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단순한 도피주의자가 아닌, 일체의 제도와 속박을 거부하는 자유로운 영혼이 마음 속에 그려진다.



 박씨는 “시를 통해 내가 갖고 있는 감정을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생각을 ‘감정의 공산주의’라고 표현했다. 인간이 타인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사랑인데, 사랑을 포함한 자신의 감정을 다른 사람들과 골고루 나누고 싶다는 것이다. 박씨는 또 “시를 쓸 때 의미가 훼손되더라도 말의 리듬을 살리는 쪽을 택했다”고 했다. 중얼거리며 반복해 읽을 때 맛이 살아나는 시집이라는 설명이다.



글=신준봉 기자

사진=안성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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