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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古今通義 고금통의] 사가독서(賜暇讀書)

중앙일보 2011.06.15 00:07 종합 33면 지면보기








교수들의 안식년과 비슷한 개념이 사가독서(賜暇讀書)다. 사가독서는 변계량(卞季良)이 태종에게 젊은 유생 한두 명을 선발해 고요한 곳에서 독서 휴가를 주자고 청한 데서 비롯되었다. 『세종실록』 10년(1428) 3월조는 세종이 “태종께서 옳게 여기셨지만 실행하지 못했다”고 전한다. 예산 문제 때문이었을 것이다. 세종은 재위 8년(1426) 12월 권채(權採)·신석견(辛石堅)·남수문(南秀文) 등에게 “지금부터는 집현전에 나오지 말고 집에서 독서에 전심하여 성과를 거두어 내 뜻에 부응하라”고 사가독서 제도를 실시했다.



 조선은 지금처럼 만만한 나라가 아니어서 사가독서라고 놀 수 없었다. 세종은 “독서하는 규범은 마땅히 변계량의 지시에 따르라”고 명했는데, 『국조보감(國朝寶鑑)』 성종(成宗)조에 전하는 사가독서 사목(事目:세부 규칙)은 흡사 박사학위 신청자들의 시간표 같다. “각자 자신이 읽은 경사(經史)의 권수를 매 계절의 첫 달에 적어서 아뢴다. 매달마다 세 차례 제술(製述:논문 저술)하되 예문관 관원의 월과(月課)와 동시에 제술하고 성적을 매겨서 시상하는 것도 예문관의 규례대로 시행한다”고 규정했다. 또한 “정조(正朝:새해 첫날)와 동지(冬至), 큰 경사와 큰 하례 때 이외에는 한 번도 참석하지 말라”고 해서 조정 일에 개입하지 말고 연구에만 전념하라고 명했다.



 사가독서는 단종 복위 기도 사건에 집현전 학사들이 대거 가담하면서 혁파되었다가 성종 7년(1476) 6월에 다시 부활한다. 이때 서거정(徐居正)이 “도성 안에 있으면 벗이 찾아오고 집에도 자주 가게 되어서 공부에 전념하지 못하니 산사(山寺)에서 독서하게 해야 한다”고 건의해 성종 23년(1492) 용산호(龍山湖) 곁에 있는 폐사를 수리해서 독서당(讀書堂)으로 삼았다. 이 때문에 사가독서를 호당독서(湖堂讀書)라고도 하는데 공부에만 몰두하다 건강을 해칠까봐 가절(佳節)이면 국왕이 잔치를 베풀었는데, 이를 ‘문장을 대접하는 잔치’라는 뜻의 ‘문장접(文章接)’이라고 불렀다.



 사가독서 출신 중에 인재가 많이 배출된 것은 혹독하게 공부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런 제도 덕분이었다. 현행 안식년 제도에 대해 비판이 이는 것은 연구년이 아니라 노는 해로 인식해도 괜찮은 제도적 결함과 일부 교수들의 그릇된 행태 때문이다. 사가독서를 통해 훌륭한 학자들이 많이 배출된 것처럼 안식년 제도를 통해 좋은 논문과 저작들이 많이 쏟아진다면 누가 비판하겠는가?



이덕일 역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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