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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 없는 열정으로 한 발 한 발...그에게 예술은 마라톤이다

중앙선데이 2011.06.12 01:00 222호 3면 지면보기
1 39Aggregation08-D053 BLUE39(2008), Mixed Media with Korean Mulberry Paper,195x160cm 2.Aggregation07-D123(2007), Mixed Media with Korean Mulberry Paper, 151x151cm 3.Aggregation10-JL022A(2010), Mixed Media with Korean Mulberry Paper, 195x99cm 4.Aggregation10-NV043(2010) Mixed Media with Korean Mulberry Paper, 195x132cm
이번 전시는 코네티컷주의 MoMA로 불리는 얼드리치 현대미술관(2008년),와이오밍대 미술관(2009년)에 이어 작가의 세 번째 미국 미술관 순회전이다. 그는 이미 런던(2006년 애널리 주다 파인아트 갤러리), 뉴욕(2008년 로버트 밀러 갤러리), 도쿄(2009년 모리미술관) 등 세계 대도시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이번 전시는 대도시를 넘어 중소도시로까지, 그것도 미술관을 중심으로 한국 현대미술이 영역을 확장한다는 의미가 있다.데이비드 버틀러 녹스빌 미술관장은 “그의 전시는 미국 내에 더 알려질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의 작품은 가까이에서 볼 때와 멀리서 볼 때가 다릅니다. 살아 움직이는 생물 같다는 느낌도 듭니다. 오늘 보고 며칠 뒤 다시 보면 크게 자라 있는 것 같거든요.”

미국 테네시주 녹스빌 미술관에서 세 번째 미국 순회전 개최한 전광영 화백

큐레이터 스테판 윅스는 “이번 전시를 위해 한국의 한약방 문화까지 두루 공부했다”며 “스모키 마운틴 등 자연휴양 도시로 유명한 녹스빌은 여름이면 미국 전역에서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는데 이들이 미술관을 방문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벌써 기대된다”고 말했다.관람객 앞에서 유창한 영어로 소감을 밝히고 돌아선 전 화백의 목소리가 약간 쉰 듯했다. “미국 사람들, 정확한 사람들이거든요. 자기가 아니라고 생각하면 그냥 ‘축하한다’ 한마디 하고 돌아서서 자기 볼 일 보는데, 오늘은다들 끝까지 제 말을 경청해 주었어요. 진심 어린 축하는 마음으로 전달되거든요. 그런 말을 들을 때 저는 다시 힘이 솟아납니다.”전 화백은 감회가 깊은 듯했다. 올해는 그가 필라델피아 미술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한 지 꼭 40년이 되는 해. 문득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홀로 세상과 싸우다
아버지는 자수성가로 연탄공장과 사슴목장 등 사업을 크게 이룬 강원도 홍천의 유지였다. 똑똑한 2대 독자 아들이 가야 할 길은 응당 서울대 법대였다.중학교 1학년 때 대도시로 나와 하숙하며 공부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을 잡아당긴 것은 도화지. “미대 가고 싶다”는 고 3 아들에게 아버지는 “그럼 호적에서 파겠다”고 최후통첩을 했다.“홍익대 미대 합격증을 주머니에 넣고 집에 돌아왔더니 다들 제가 법대에 떨어진 줄 알고 있더라고요. 어머니에게 조심스레 합격증을 보이니까 ‘이제 우리 식구 다 죽었다’ 하셔요. 할머니가 몰래 여기저기서 변통해준 등록금
만 들고 다시 올라왔죠.”그 뒤로 아버지는 모든 지원을 끊고 다시는 아들을 보지 않았다. 심지어 임종도 못하게 했다. 부잣집 아들 시절일랑 빨리 잊어야 했다. 대학 1학년부터 끝도 없는 아르바이트가 시작됐다.

“가정교사를 모집한다는 신문광고를 보고 찾아간 집이 당시 서슬이 퍼렇던 청와대 경호실 차장댁이었어요. (오자마자 다들 나가서) 내가 일곱 번째 가정교사였는데 혼낼 땐 혼내면서 중학생 딸을 열심히 가르쳤더니 인정을 받았어요. 마침 ‘미술을 알아야 (상사였던) JP(김종필 전 총리)와 이야기가 되겠다’ 해서 아버지까지 가르치게 됐죠.”덕분에 가까스로 이룰 수 있었던 미국 유학. 하지만 그의 추상표현주의 미술에 미국 미술계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설상가상 비자서류가 잘못되어 수년간 불법체류자의 신분으로 전락했다. 어린 자식들이 영양실조로 황달에 걸렸는데 병원을 갈 수가 없었다. 두 차례나 자살을 시도했을 정도였다.

1978년 서울로 돌아왔지만 암울했다. 대학 동기나 선후배들은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다. 혼자만 낙오자였다.“78년부터 90년까지 매년 전시회를 했어요. 다른 친구들은 화랑의 초대를 받았지만 저는 제가 돈 내고 빌려서 하는 대관전이었죠. 그래도 이를 악물 었어요. 비관하지 않았습니다. 난 꼭 잘될 것이라고 믿었죠. 왜? 난 매일 그림을 그렸으니까. 난 마라토너니까. 이길 때까지 작업을 할 것이니까.”

자신만의 예술을 찾아내다
그가 ‘자신만의 예술’을 찾기 위해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다가 문득 어릴 적놀러 갔던 큰아버지 한약방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보자기처럼 약재를 싸던 한지, 천장에 삐죽삐죽 매달아 놓은 약첩들.“그 돌출감을 처음엔 신문지로 표현했어요. 그런데 100호짜리를 만드니 너무 무거운 거라. 그래서 생각하다 고서의 한지로 바꿨죠. 90년대 초 전시를 했는데, 공예로 분류하질 않나 조롱을 하질 않나. 그런데 돌아가신 미술 평론가 이일 선생님께서 보시더니 ‘전광영이, 사고 치겠네’ 하셨어요. 그 말이 제겐 천군만마 같은 힘이 됐죠.”

무엇이든 감싸안고 더 찔러 넣을 수 있는 보자기는 어머니의 정(情)이었다. 그 정을 떠올리며 70~80년 된 옛날 책을 낱장으로 잘라 수천 수만 다양한 크기의 삼각 스티로폼을 하나씩 싸고 노끈으로 묶었다. 한문 글씨가 새겨진 낡은 한지를 만질 때마다 손때 묻은 선인들의 이야기가 들렸다.그 작품이 그의 삶을 확 바꿨다. 작품을 눈여겨본 컬렉터 하나가 당시 제일 거래가 활발하던 박영덕화랑과 연결해줬고, 마침 95년 시카고 아트페어에 2점을 출품하게 됐다.“내 것만 다 팔렸다는 소식이 들어왔어요. 화랑에서는 이듬해 12점을 갖고 다시 나갔죠. 그런데 또 다 팔리고 제작 주문까지 들어온 거라. 한국에서는 아무도 인정을 안 해줬지만 외국에서 먼저 알아준 거죠. 시장에서 인정받았다는 생각에 정말 신나더군요.”

그렇게 10년 가까이 잘나갔다. 하지만 세상은 만만치 않았다. 2006년 무렵이었다. 작품에 변화가 없다는 지적이 여기저기에서 들렸다. 위기였다. 돌파구가 필요했다.“어떻게 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채석장을 지나가다가 다이나마이트를 넣어놓는 굴을 보게 됐어요. 저걸 내 작품에 표현해보자 생각했죠. 다음에는 색깔이었어요. 전통 염료를 중심으로 풀어냈어요. 치자에서 노란색을, 오미자에서 붉은색을 추려내 종이를 물들였습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깨달음이었어요. 외국에서는 작가가 2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으면 관심을 끊는다 하더라고요. 덕분에 나는 조금이지만 매일매일 변하고 있습니다. 그게 몇 년 지나면 큰 변화가 되는 것이죠.”

경기도 판교에 있는 그의 작업실에는 73년 그린 추상표현주의 그림과 95년 무렵의 초창기 한지 작업이 벽 제일 한가운데 걸려 있다. 결코 ‘초심’을 잃지 않겠다는 각오다. 책꽂이 한편에 오바마 대통령의 말을 적어놓은 메모지도 보였다. ‘난 항상 싸움에 진 under dog이었다. 그러나 역경을 이겨내고 승리해 왔다.’이제 세계를 상대로 그는 10일 뉴욕으로 떠났다. 내년 버지니아 린치버그대 도라미술관에서 열리는 네 번째 미국 순회전을 논의하기 위해서다. 이틀 뒤에는 다시 독일 슈트트가르트로 향한다. 2012년 쿤스트베르크잠룽 미술관에서 거장 안젤름 키퍼, 고트르하르트 그라우브너와의 3인전이 열리기 때문이다. 베이징 금일미술관(Today Art Museum)과 마드리드 페르란도라토레 갤러리에서도 역시 내년에 전시가 예정돼 있다. 현재 서울 신사동 갤러리현대 강남점에서 6년 만의 개인전 ‘Aggregation 2007~2011’(6월 1~30일)전이 열리고 있다.

“지금도 아이디어가 계속 떠오릅니다. 자다가도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벌떡 일어나 메모해 둡니다. 요즘 젊은 작가들 재기가 넘치는데, 반짝 아이디어만으로는 안 됩니다. 꾸준한 작업이 중요합니다.”그의 작품은 유엔 본부 한국 대표부 메인 로비를 비롯해 워싱턴DC의 우드로윌슨센터, 호주 국립현대미술관, 뉴욕 록펠러재단,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삼성미술관 리움 등에 소장돼 있다. 2007년 호주 고교 미술교과서에는 한국 현대미술 대표작가로 실렸다.그의 꿈은 미술관을 짓는 것이다. 초창기 그린 그림들과 그의 ‘집합’ 연작시리즈 변천사, 그리고 그동안 컬렉션한 작품을 중심으로 꾸밀 생각이다.“고려 하면 청자, 조선 하면 백자가 떠오릅니다. 그런데 21세기 대한민국 하면 뭐가 떠오르나요. 저는 우리 시대의 예술을 만들기 위해 예술가들이 고민해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 문화를 그렇게 설득력 있게 풀어낼 때 진정한 세계화가 되는 것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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