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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으로 가자”며 총 들이댄 인민군, 나도 총을 겨눴다

중앙선데이 2011.06.11 23:38 222호 4면 지면보기
최원팔씨가 현충일인 6일 왜관 낙동강변에 있는 칠곡군 무공수훈자 전공비를 찾았다. 좌측 상단에 그의 이름(崔源八)이 보인다. 최정동 기자
강제징집당했지만 인민군으로 복무한 건 사실이었다. 김천경찰서에서 일주일간 취조를 받고 풀려났다. 가을이 깊어가고 있었다. 원팔의 가족은 추수하고 타작을 했다. 그러나 전쟁은 청년 원팔을 내버려두지 않았다. 50년 11월 13일 국군에 입대했다.

내가 겪은 6·25<상> 두 번의 인민군, 두 번의 국군 최원팔씨

어머니는 오열했다. 아들의 운명은 왜 이리 기구한가. 해방을 석 달 앞둔 45년 5월 열일곱 나이에 징용당해 평안도 진남포로 끌려갔었다. 두 번째로는 인민군에 징집됐다 도망쳤는데 이젠 국군으로 입대하는 것이다. 어머니는 밭을 매면서도 눈물을 흘렸다. 그런 시어머니 모습에 아내 박옥자(당시 23세)씨는 배고파도 먹자고 할 수 없었다. 시어머니는 겨울에 문풍지가 떨어져도 바르지 못하게 했다. 아들이 전쟁터에서 떨고 있는데 당신이 따뜻한 방에서 잘 수 없다고 했다.

전황은 낙관적이었다. 국군과 유엔군은 파죽지세로 북진했다. 국군이 10월 1일 38선을 돌파했다. 국군1사단이 19일 최초로 평양에 입성했다. 30일엔 이승만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평양시청에서 성대한 입성 환영식이 열렸다. 다들 전쟁이 곧 끝날 거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30만 중공군이 밤안개처럼 한반도 북쪽에 스며들고 있다는 걸 모르고 있었다.

대구 성서국민학교에서 신병훈련을 받았다. 일주일간 총기 분해조립과 실탄사격 몇 번 한 게 전부였다. 차가운 화물열차 맨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북쪽으로 실려 갔다. 북한강을 사이에 두고 적과 대치 중인 춘천 7사단에 배치됐다. M1소총 신품을 지급받았다. 인민군 따발총보다 훨씬 무거웠다. 번쩍이는 총열에는 그리스(윤활유)가 두껍게 발라져 있었다. 바로 전투에 투입되었다. 싸움터는 매일 바뀌었고 정신없이 달리고 쏘았다.

전세가 급격히 뒤집혔다. 북진하던 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과 마주쳤다. 중국 대륙에서 오랜 국공내전을 거친 중공군은 강했다. 한국군도 유엔군도 눈사태를 만난 것처럼 밀려 내려갔다. 후퇴하던 원팔의 7사단 8연대 2대대는 영월 부근에서 포위됐다. 3연대가 구하러 오지 않았다면 원팔은 거기서 최후를 맞았을 것이다.

방아쇠 아무리 당겨도 중공군 줄지 않아 
봄이 왔다. 전선은 38선 부근에 형성됐다. 중공군 총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팽덕회)는 총공세를 폈다. 4월에는 서울을 향해, 5월에는 중동부전선에서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다. 51년 5월 중순 어느 날, 강원도 인제 야산 중턱. 경기관총 사수인 원팔은 북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후에 소나기가 한 차례 쏟아졌다. 하늘이 갠다 싶더니 갑자기 포탄이 비 오듯 쏟아졌다. 포격이 멈추고 자욱한 먼지가 가라앉자 산 아래 들판과 강이 시야에 들어왔다. 원팔은 눈을 의심했다. 들판이 사람으로 뒤덮여 있었다. 말로만 듣던 중공군이었다. 방아쇠를 아무리 당겨도 중공군의 숫자는 조금도 줄지 않았다. 실탄은 금세 떨어졌다. 중공군이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접근했다. 그들은 앞 사람의 시신을 밟으며 몰려왔다.

기관총을 땅에 묻고 달아났다. 갑자기 왼쪽 팔뚝에 불붙는 듯 통증이 느껴졌다. 관통상이었다. 대충 상처를 감싸고 산 속으로 몸을 숨겼다. 온 천지가 중공군이었다. 동료 대여섯 명과 산 속에서 적을 피해 다녔다. 사흘째 해 뜰 무렵 중공군이 포위망을 좁혀왔다. 동료들은 ‘기왕 이렇게 됐으니 한 놈이라도 더 죽이자’며 수류탄을 던지며 저항했다. 무기는 곧 바닥났다. 부상병을 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원팔은 두 손을 들고 중공군 앞에 나섰다. 산속에서 숨어 지낼 때는 배고픈 줄도 몰랐는데 붙잡히자 일어설 힘조차 없었다. 51년 5월 18일이었다.

정신적 충격으로 가족도 못 알아봐
원팔은 인민군에 인계됐다. 성한 사람은 밤에 북쪽으로 끌려가고 부상병은 내금강 장안사로 이동했다. 한창 때는 서른 채에 달하는 건물이 거대 가람을 이뤘던 장안사는 불에 그슬린 주춧돌만 굴러다녔다. 적의 소굴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미 공군이 금강산의 오래된 절들을 폭격했기 때문이다. 포로들은 계곡의 민가에 수용됐다. 초여름 금강산은 아름다웠다. 기묘한 형상을 한 바위들은 만물상이었다. 원팔은 부상자를 옮기고 전사자의 시신을 운반하는 일을 해야 했다. 일이 없을 때는 종일 사상교육을 받았다. 인민공화국과 사회주의에 대해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다. 저녁에는 상호비판과 자아비판이 이어졌다. 몇 차례 사상을 지적받은 사람은 어디론가 끌려갔다.

가족을 생각했다. 흐느끼던 어머니, 여린 아내, 두 살 된 아들. 올해 농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동생 원수·원덕·정수는 아직 어렸다. 어떻게 해서든 살아서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방법은 있었다. 전향하면 인민군에 편입될 수 있었다. 원팔은 열심히 일하고 교육도 적극적으로 받았다. 두 달이 지났다. 포로 수백 명 중 원팔을 포함해 두 명이 선발됐다. 인민군은 둘에게 사격훈련을 시켰다. 원팔에게 따발총은 익숙한 무기였다. 훈련을 마치자 인민군 전투부대에 가라고 했다. 전방부대로 가는 중에도 유엔군의 포탄이 떨어졌다. 부대 주변은 지옥도였다. 나뭇가지에는 시신 조각이 여기저기 걸려 있었다.

전향은 당연히 위장이었다. 탈출해야 했다. 유엔군이 밤에는 공격하지 않아 야간 경계가 느슨했다. 배치 이틀 만에 한밤중에 따발총과 수류탄 두 개를 들고 부대를 빠져나왔다. 홍천 부근 북한강 지류에 도착했다. 강 건너편에는 국군이 있었다. 날이 밝을 무렵 헤엄쳐 건넜다. 강둑에 올라가자마자 남쪽으로 달렸다. 어디선가 나타난 미군병사가 소리를 질렀다. 당황한 미군이 방아쇠를 당길 수도 있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두 번째 인민군 복무는 그렇게 끝났다.

대구의 ‘낙오자수용소’로 갔다. 북측에 포로로 잡혀 있다 온 사람들이 수용됐다. 목숨 걸고 돌아왔지만 원팔은 한 달간 심문을 받았다. 기본적인 질문은 연도(年度)였다. 북한은 서기(西紀)를, 남한은 단기(檀紀)를 사용하던 때였다. 생일이 몇 년도냐, 물어봐서 서기를 대면 옷에 붉은 페인트로 ‘빨갱이’라고 썼다. 원팔은 심문에서 통과했다. 하지만 갑자기 쇼크가 왔다. 지난 시간들의 충격 때문에 그는 거의 실성상태가 됐다. 자다가 발작을 일으키고 깨어있을 때도 눈에 초점이 잡히지 않았다. 어떻게 알았는지 어머니와 아내가 면회를 왔지만 원팔은 이들을 알아보지도 못했다. 육군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제 정신이 돌아오자 복귀 명령이 떨어졌다.
 
백암산 전투서 중공군과 싸워 전공
51년 겨울, 다시 전선으로 갔다. 7사단은 북한강 도하작전을 벌였다. 원팔은 이번엔 엉덩이에 수류탄 파편을 맞아 수술을 받았다. 완치 후 6사단으로 배속됐다. 휴전협상이 진행되고 있었지만 그럴수록 싸움은 치열하게 전개됐다.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기 위한 고지쟁탈전이었다. 강원도 산들은 붉게 물들어갔다.

53년 6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은 반공포로를 석방했다. 중공군은 보복으로 대규모 공세에 나섰다. 아군의 점령지가 북쪽으로 뾰족하게 돌출된 화천군 금성리였다. 원팔은 이 지역 방어를 담당한 국군 5개 사단 중 하나인 6사단 소속이었다.

원팔은 중사 계급장을 단 선임하사가 되어 있었다. 7월 13일 중공군은 24만 명의 병력을 동원해 금성지구 돌출부를 공격했다. 금성지구 후방의 백암산(1179m)을 지키던 5사단은 중공군에 고지를 내주고 말았다. 재공격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5사단은 6사단에 지원을 요청했다. 6사단 7연대 소속이던 원팔은 백암산 탈환공격에 나섰다.

전투가 시작된 13일부터 많은 비가 내렸다. 땅은 젖어 있고 고지는 높았다. 진지를 구축한 중공군은 강력히 저항했다.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러나 한국군은 고지를 다시 빼앗았다. 산을 점령하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진지 구축이다. 그런데 진지 구축작업을 하려고 무기를 내려놓은 것이 실수였다. 어느 틈에 다시 산을 기어오른 중공군이 인해전술로 덮쳐 왔다. 고지의 주인은 다시 바뀌었다.
산 아래에서 권총을 든 헌병이 병사들을 모았다. 피땀과 진흙으로 범벅이 된 병사들은 귀신 같았다.

인원을 점검해보니 선임하사는 모두 죽거나 부상을 당했다. 원팔은 남은 병력을 이끌고 재공격에 나섰다. 다시 고지를 점령해 중대 병력을 확인하니 200명 중 32명 만이 남아있었다. 깊은 밤, 어디선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를 따라가보니 사병들이 산 꼭대기에서 공포에 질려 부둥켜안고 울고 있었다. 산 아래엔 중공군이 가득했다. 언제 다시 공격이 시작될지 알 수 없었다. 잊을 수 없는 길고 끔찍한 밤이었다. 날이 밝자 5사단이 올라왔다. 진지를 인계하고 철수했다. 며칠 뒤인 7월 27일 총성이 멎고 1128일간의 전쟁은 끝났다.
 
반세기 만에 지각 배달된 훈장
최원팔은 54년 11월 10일 전역해 가족에게 돌아갔다. 아들은 다섯 살이 되어 있었다. 어머니는 통곡하며 아들을 껴안았다. 그는 휴전 뒤 경북 왜관에 정착해 평생 학교 기능직 사원으로 일했다. 54년 4월 대한민국 정부는 그에게 화랑무공훈장을 수여했다. 그러나 훈장은 반세기도 더 지난 2005년에 전달됐다. 행정착오였다. 국가보훈처는 훈장을 ‘택배’로 배달했다. 그 안에는 메달과 육군참모총장이 준다는 기념품이 들어 있었다. 그게 대한민국이 국가 유공자에게 한 예우였다.

최원팔씨는 민주주의나 자유, 대한민국 같은 대의를 위해 싸웠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어떻게든 살아남아 가족에게 돌아가기 위해 싸웠다. 인민군복을 두 번 입었지만 목숨을 걸고 돌아왔다. 국가유공자가 된 그는 국립묘지에 묻힐 수 있게 됐다. 최씨는 “후손들이 벌초하느라 고생 안 하게 돼 다행”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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