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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에게 굽실거릴 수 없다” … 노태우의 총리 제의 거절

중앙일보 2011.06.08 02:56 종합 12면 지면보기



한국 현대사 ‘꼿꼿한 지성’ 김준엽





일제강점기 학병(學兵) 탈출 1호, 이범석 장군의 부관으로 항일 무장 독립운동을 펼쳤던 투사, 해방 후 1세대 중국학·공산주의 전문가, 역사학자, 대학총장…. 예사롭지 않은 삶이었음을 일러주는 이력인데, 그 모든 화려한 호칭과 수식어보다 ‘지성의 절개’라는 담백한 표현이 잘 어울렸던 사람-. ‘영원한 광복군’ 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의 만 90세 일기는 파란만장했지만 소박했다.



 고인은 “현실에 살지 말고 역사에 살라”는 좌우명처럼 살다 갔다. 후학들에게 이런 말도 남겼다. “‘역사의 신’을 믿으라. 정의와 선과 진리는 반드시 승리한다.”





1985년 2월 고려대 졸업식 풍경은 아주 예외적이었다. 재학생과 졸업생이 총장 사퇴를 반대하는 시위 속에 식이 진행됐다. 82년 고대 총장이 된 고인은 정권에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80년 광주 민주화운동 이후 대학가 데모가 끊이지 않던 시절이다. 데모 주동자를 징계하라는 압력에 그는 “내가 그만두겠다”고 버텼다. “김준엽 총장 사퇴 반대” 시위가 1개월 넘게 이어졌다.



 ‘총장 사퇴하라’는 시위에 익숙한 한국 현대사에서 그는 매우 예외적 존재였다. 그 시절 대학을 다닌 박명림 연세대 교수는 “김준엽 총장이 받은 많은 훈장 중 최고의 영예로운 훈장”이라고 기억했다.



 격동의 20세기를 온몸으로 부딪쳐 온 고인의 일생엔 두 차례 결정적 선택의 순간이 있었다. 1944년 일본 게이오(慶應)대 사학과에서 유학하던 21세의 청년 김준엽은 학병으로 강제 징집당했다가 탈출하는 모험을 감행한다. 첫 번째 선택이었다. 회고록 『장정(長征)』(전5권·나남)에서 그는 “목숨을 건 탈출”이었다고 술회했다. 일본군 탈출 후 중국 유격대에 들어가 항일투쟁을 하다가 다시 6000㎞를 걸어 충칭(重慶)의 우리 임시정부에 참여하는 과정은 대하드라마 그 자체다.









일제 강점 말기인 1945년 국내 진입작전을 준비하던 세 사람의 광복군 노능서·김준엽·장준하(왼쪽부터). 김준엽은 해방 이후 ‘사상계’ 발행인으로 유명해진 장준하에 대해 “학병 탈출 이후 중국 유격대 시절부터 가장 가까운 동지로서 함께 지냈다”며 “회고록 『장정』은 장준하와의 연인과 같은 우정의 기록”이라고 말했다,






 광복군 마지막 세대인 그는 한·미 합동 군사작전을 위한 특수훈련까지 받은 정예 독립투사였다. 미 전략사무국(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 특별훈련을 받고 국내 지하공작원으로 진입을 준비하던 중 일본의 항복을 맞이했다.



 해방 후 백범 김구는 그에게 함께 나라를 위해 일하자고 했다. 정치를 하자는 제안을 뒤로 하고 그는 학자의 길을 걷는다. 초대 내각 총리를 지낸 이범석 장군의 영입 제의도 거절했다. 두 번째 선택이었다.



 고인은 정치에 소질이 없다고 생각했다. 현대 중국과 공산권을 연구한 1세대 학자로서 큰 업적을 남겼다.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를 세계적 연구기관으로 키워냈다. 『한국공산주의운동사』 『중국공산당사』 『중국 최근세사』 등을 펴냈다.



 85년 고려대 총장직을 그만뒀지만 그에겐 ‘영원한 총장’이란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유혹은 많았으나 다른 길을 걷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를 ‘지조(志操)의 선비’로 기억하게 하는 이유다.



 88년 1월 대통령 당선자 노태우는 궁정동 안가로 김준엽을 초빙해 국무총리직을 제안한다. 그날의 대화를 일기장에 이렇게 적어놓았다(『장정』 4권 참조). “첫째, 노태우 당선자를 두 번 만난 일은 있지만 잘 모른다. 덮어놓고 중책을 맡는 풍토는 고쳐져야 한다. 둘째, 국정자문회의 의장을 맡게 되는 전두환씨에게 총리로서 내 머리가 100개 있어도 고개를 숙일 수 없다. 이건 내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다. 내가 전씨 앞에서 굽실거리는 모양을 TV를 통해 보는 국민들, 특히 젊은층들은 실망할 것이다. 셋째, 나는 지난 대선 때 야당 후보자를 찍었다. 넷째, 나는 교육자다. 이 나라 민주주의를 외치다 투옥된 많은 학생이 아직도 감옥에 있다. 제자가 감옥에 있는데, 스승이라는 자가 어떻게 그 정부의 총리가 될 수 있겠는가. 다섯째, 지식인들이 벼슬이라면 굽실굽실하는 풍토를 고쳐야 한다. 좀 건방진 말이긴 하나, 나 하나만이라도 그렇지 않다는 증명을 보여줘야겠다.”



 그는 평생 고위 공직을 제의받았다. 초대 총리 이범석 장군의 영입 제의→4·19 혁명 후 장면 내각의 주일대사 제의→5·16 후 김종필의 공화당 사무총장 제의→1974년 대통령 박정희의 통일원 장관 제의→노태우 대통령의 총리직 제의→김영삼·김대중 대통령의 총리직 제의 등이다. 모두 거절했다.



 총장 퇴임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회고록 집필이었다. 44∼45년 풍찬노숙(風餐露宿)했던 독립운동가들의 마지막 광경을 지켜본 그는 그 시절에 대한 기록(『장정』의 1, 2권 ‘나의 광복군 시절’)을 남기는 일을 자신의 임무로 여겼다.



 88년 이후엔 사회과학원을 설립해 한·중 우호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 베이징(北京)대를 비롯해 중국의 11개 대학에 한국학연구소를 세웠다. 중국 교육부로부터 문화훈장에 해당하는 ‘중국어언문화우의장(中國語言文化友誼奬)’을 받았다. 92년 한·중 수교 이후 한국인이 중국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기는 그가 처음이었다.



배영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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