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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청춘은 맨발이다 (32) 스파이 작전

중앙일보 2011.06.07 01:12 종합 27면 지면보기



‘맨발의 청춘’은 기획 빼돌려 탄생한 히트작



오늘의 신성일을 만든 ‘맨발의 청춘’(1964)에서 엄앵란(오른쪽)이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다. 신성일과 엄앵란은 다른 영화사에서 들은 이 영화의 아이디어를 극동흥업에 넘겼다.





나와 엄앵란이 스파이가 된 적이 있다. 내 최대 히트작인 ‘맨발의 청춘’이 스파이 작전으로 탄생했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이 사건을 이야기하기 전에 반드시 짚어야 할 작품이 있다. 1963년 나온 ‘청춘교실’이다. 조선일보는 이 무렵 광화문 사옥 옆에 운영하던 시네마극장을 한국영화 전용극장인 아카데미극장으로 바꾸었다. 방우영 조선일보 전무는 김연준 한양대 총장에게 연극영화과와 영화사를 설립해 아카데미극장 개관 영화를 제공해달라고 요청했다. 그 바람에 생긴 게 한양영화사였고, 아카데미극장 개관 프로그램으로 일본 작품이 원작인 ‘청춘교실’을 기획했다. ‘아낌없이 주련다’ ‘가정교사’ 등으로 입지를 굳힌 나는 엄앵란·최지희·남미리·방성자 등과 함께 캐스팅됐다.



 ‘청춘교실’의 배경은 대학교였다. 김수용 감독은 촬영무대를 건국대 캠퍼스로 잡았다. 당시 캠퍼스에 호수가 있는 학교는 그곳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발랄한 젊은이들의 상을 그려 크게 히트했다.



 이후 아카데미극장은 청춘영화 전용극장으로 이름을 날렸다. 로비가 긴 복도로 돼 있고, 그 양쪽을 열대어 수족관으로 장식해 젊은이들의 눈길을 잡았다. 열대어를 감상하며 15m 이상 걸어 들어가야 했으니 당시로선 명물이었다. 한양영화사는 ‘청춘교실’을 히트시킨 다음 또 다른 청춘물을 아카데미극장에 걸고 싶어 했다.



 어느 날 ‘청춘교실’로 인연을 맺은 한양영화사의 최모 기획실장이 나와 엄앵란을 불러 식사를 사며 다음 작품에 대한 구상을 들려주었다. 훗날 ‘맨발의 청춘’이 된 기획이었다. “일본에서 히트한 작품이 있어. 남자는 뒷골목 젊은이고, 여자는 대사의 딸이지. 결국 두 사람의 자살로 끝나는 작품이야. 딱 둘이서 하면 되겠다.”



 일본 원작의 제목은 ‘맨발의 청춘’이 아니었다. ‘맨발의 청춘’은 최 실장이 즉흥적으로 붙인 것이었다. 선배 격인 그는 개인 생각을 들려준 것일 뿐, 이 작품을 회사에 정식 제안하진 않은 것 같았다. 나와 엄앵란은 이미 여러 영화에서 호흡을 맞춰 각 영화사의 분위기를 훤히 꿰뚫고 있었다. ‘가정교사’로 극동흥업, ‘청춘교실’로 한양영화사의 분위기를 비교할 수 있었다.



 나는 이 작품을 더 잘 만들 수 있는 곳은 극동흥업이라고 생각했다. 한양영화사는 규모만 클 뿐, 작품을 알차게 만드는 시스템이 부족했다. 극동흥업은 김기덕이란 유망 감독을 전속으로 두고 있었다.



 내 생각을 엄앵란에게 이야기했더니, 그도 같은 의견이었다. 우리는 그 기획을 극동흥업에 넘기기로 했다. ‘맨발의 청춘’이란 기획에 깜짝 놀란 극동흥업의 차태진 사장은 우리 말을 대번에 알아 들었다. 곧바로 ‘가정교사’를 각색한 서윤성 작가를 중심으로 대본 입수작업이 이루어졌다. 시나리오는 그 다음 날로 극동흥업에 들어왔다. 일본의 4대 메이저 영화사 중 하나인 니가츠(日活)사 작품이었는데, 서 작가가 일본 라인을 통해 구한 것이었다. 극동흥업은 기획과 동시에 촬영에 들어갔고, 결국 ‘맨발의 청춘’은 64년 초 아카데미극장에 걸렸다.



 만약 ‘맨발의 청춘’이 한양영화사로 갔으면 어떻게 됐을까. 돌아보면 내 인생의 분수령이었다. 나름대로 성공한 스파이 작전이었다.



신성일

정리=장상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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