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글로벌 아이] 선각자와 지도자

중앙일보 2011.06.07 00:34 종합 34면 지면보기






김현기
도쿄 특파원




“당선자님. 제가 긴히 드릴 건의가 있습니다. 이건 아마 대한민국밖에 하지 못할 일입니다.”



 1998년 2월 9일 서울 여의도의 국민회의 총재실. 정치부 기자 시절이었다. 당시 41세인 손 마사요시(한국명 손정의) 소프트뱅크 사장이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에게 불쑥 이야기를 꺼냈다. “뭐요.”



 손 사장의 제안은 초고속 인터넷 통신망을 3년간 전 국민에게 무료로 개방하자는 것이었다. 한국 젊은이들이 앞다퉈 벤처와 혁신적 창업을 하도록 하자는 취지다. 김 당선자가 되물었다. “공짜로 하면 사업자는 뭐가 남소.” 손 사장은 기다렸다는 듯 설명을 이어갔다. “그걸 국가정책으로 하는 겁니다. 정부가 일정 예산을 책정해 사업자에게 무이자로 융자해 주고 3년 후 서비스를 유료화해 사업자가 이익을 남기면 상환받으면 됩니다. 요즘같이 인터넷 정보통신망 사용료가 비싸면 젊은 벤처사업가들이 주저앉고 맙니다. 3년 마음껏 쓰게 하면 생각하지도 못했던 산업들이 속속 생겨날 겁니다. 세계 어느 나라도 이걸 못합니다. 이걸 한국이 최초로 해야 미국·일본 따라잡고 정보화 혁명을 이루는 선두 국가가 됩니다.”



 곰곰이 생각에 잠긴 김 총재에게 손 사장은 “당선자님. 전 소프트웨어 업자입니다. 이 구상에 이해관계가 없습니다. 정부 부담도 없고 지혜와 정책만으로 되는 일입니다. 실은 이 생각을 일본에서도 10년 전부터 주장하고 있지만 일본의 총리는 자주 바뀌고 만나 주지도 않고, 리더십도 없습니다.”



 김 당선자는 옆에 있던 정호선 의원을 가리키며 “저 사람이 특허가 103개나 돼요. 잘 이야기해 보세요.” 손 사장의 제안은 ‘퉁’됐고 결국 물거품이 됐다.



 세월이 지나 한국은 정보기술(IT) 강국으로 발돋움했다. 하지만 당시 손 사장의 제안이 현실화됐다면 아이폰·아이패드와 같은 도전적인 결과물이 한국에서 가장 먼저 탄생하지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 아무리 위대한 선각자도 그걸 수용하고 소화하는 지도자의 뒷받침, 리더십이 없으면 허망해지는 법이다. 찍새가 아무리 구두를 갖고 와도 딱새가 멋 나게 물광을 내지 않는 한 구두닦이 사업이 성립되지 않는 이치와 같다. 그런 점에서 손 사장은 불운했다.



 불운은 계속되는 법일까. 최근 일본 정치권의 움직임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든다.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福島) 제1원전사고 이후 손 사장은 대규모 태양광 발전소(메가솔라) 건설 계획을 가장 먼저 제안했다. 상당수 지자체가 동조했다. 간 나오토(菅直人) 총리도 솔깃해하며 적극적 추진을 약속했다.



 하지만 바로 엉망진창이 됐다. 일본의 지도자인 간 총리는 불신임안 통과의 궁지에 몰리자 퇴진할 듯 연막을 피우다 “그런 적 없다”고 돌변하는 등 ‘정치 서커스’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그래봐야 몇 달 더 연명할 뿐인 걸. 선각자 손정의의 구상 또한 물거품이 될 공산이 커졌다. “총리가 자주 바뀌고 리더십도 없고…”라던 13년 전 손정의의 푸념은 언제까지 재방송돼야 하나.



김현기 도쿄 특파원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