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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기념관과 함께 하는 독립유공자 시리즈 ⑤ 동초 이종건 선생

중앙일보 2011.05.31 03:30 6면 지면보기
충남 천안은 충절의 고장이다. 유관순 열사부터 석오 이동녕, 유석 조병옥 선생, 충무공 김시민 장군 등을 배출한 고장이다. 아산에도 활발히 활동한 독립운동가의 삶의 터전이 남아있다. 중앙일보 천안·아산이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와 함께 지역의 독립운동가를 재조명해 보는 독립유공자 시리즈를 기획, 연재하고 있다. 이종건 선생이 다섯 번째 소개된다.


역사에서 잊혀져가는 항일 투사
일제의 밀정을 색출해 처단하다

김정규 기자 , 도움말=김용달 독립기념관 수석연구위원



역사의 미아, 민족혁명당과 조선의용대









이종건 선생이 다녔던 중국 육군중앙군학교 낙양분교 자리.







그동안 독립운동사에서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한 것이 민족혁명당과 조선의용대 세력이다. 민족혁명당은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진보적인 민족주의 이념을 지닌 독립운동 정당이었고, 그 산하 무력인 조선의용대는 중일전쟁 이후 한중 연합작전의 핵심 세력으로 대일 무장투쟁의 주력이었다.



 그럼에도 이들은 남북한 양쪽에서 ‘역사적 미아(迷兒)’로 남아 있다. 남한에서는 친공세력으로 몰려 오랫동안 역사에서 사라졌다가 1980년대 이후 비로소 재평가되기 시작했다. 이와 반대로 북한에서는 정권 수립에 참여했다가 1950년대 중반 연안파 숙청과 주체사관이 공식 역사관으로 자리 잡으면서 잊혀진 역사가 되고 있다.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 가장 진보적인 이념과 가장 강력한 투쟁방식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후손들은 그분들의 명예조차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천안출신 이종건(李鍾乾)은 바로 그런 민족혁명당·조선의용대 계열의 독립운동가다.



중국 망명, 독립운동에 가담하다









중동학교 졸업장.











휘문고보 졸업장.





이종건은 1906년 5월 14일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수신면 속창리(옛 천원군 수신면 속창리)에서 태어났다. 한말 ‘을사조약’직후 나라가 스러져가던 때에 태어났고, 경술국치 이후 일제의 가혹한 식민지 지배와 수탈이 자행되던 시기에 성장기를 보냈다. 그 때 그 시절을 보내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이 그 또한 항일 민족의식을 갖게 되었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그는 이 같은 생각을 실천했다는 점일 것이다.



 이종건이 독립운동에 참여한 시기는 1928년 3월 휘문고를 졸업한 직후 은사인 민세 안재홍의 주선으로 중국 망명을 단행한 때부터였다. 특히 1931년 9월 북경에서 한족동맹회에 가입하면서부터다. 여기서 그가 맡은 역할은 독립운동가들과 한인 동포들을 보호하고, 일제의 밀정을 색출하여 처단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같은 해 10월 일제의 밀정을 색출해 처단했고, 그로 인해 일경의 추적을 받게 되자 상해로 옮겨 갔다.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



이종건은 상해에 도착한 뒤 임시정부 산하의 교민 자치기구인 대한교민단 의경대에 들어갔다. 당시 상해 대한교민단장은 김구였고, 의경대장은 박창세였다. 이종건은 의경대원으로 임정 요인들과 한인 동포들을 보호하고, 상해에 출입하는 한인들의 신상을 파악해 밀정 및 친일파를 색출하는 일을 했다. 다른 한편으로 1932년 1월 상해에서 좌우합작 청년운동 조직으로 결성된 한인청년당에 참여해 활동했다.



 이종건은 임시정부 관련 단체에서 활동하면서 독립운동가로서 명성을 쌓아 1931년 12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의 충청도선출 의원으로 선발됐다. 이후 1933년 3월 사임하기까지 약 1년 4개월 동안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약했다. 이봉창·윤봉길 의거 직후 일제의 파괴 책동이 어느 때보다 심했던 시기에 임시정부를 사수하는데 일익을 담당한 것이다.



민족혁명당과 조선의용대에 참가하다



임시정부와 여당인 한국독립당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이종건에게 새로운 전기가 왔다. 진보적 민족주의 독립운동 정당이자 민족대당 형식으로 1935년 7월 민족혁명당이 창당되자 여기에 참여한 것이다. 자의인자 타의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당시 이종건은 중국 육군중앙군관학교 낙양분교의 한인특별단을 수료한 뒤 한국독립당 산하의 한국특무대독립군에 있었다.



 그런데 민족대당 형식으로 민족혁명당이 결성되자 한국독립당도 여기에 참여했다. 한국특무대독립군도 민족혁명당 군사부에 편입됐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종건은 진보적 민족주의 이념으로 삼균주의와 사회주의를 수용한 독립운동 정당이자 좌우 민족세력이 한데 모여 결성한 민족대당인 민족혁명당에 참여했고, 이후 민족혁명당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민족혁명당에 참여한 이종건은 군사부에 들어가 중국 군경의 협조 아래 남경·상해 등지에서 일본군에 대한 정탐 활동, 일본인 관리 암살, 그리고 일제 시설 파괴 공작 등 항일 투쟁을 펼쳤다. 나아가 1938년 10월 10일 호북성 양자강 연안의 한구에서 민족혁명당의 무력으로 조선의용대가 창설되자 제1구대 요원이 됐다.



 같은 해 12월 초 일본군이 장사 침공을 개시하자 중국군 제9전구 사령부에서 활동하면서 이재민 구호사업 및 도시 복구사업에 참여했다. 아울러 1939년 3월부터 5월까지 여러 차례 유격전으로 일본군의 통신시설과 교량, 군용 차량과 전차까지 폭파하는 전과를 올렸다.



 조선의용대는 1941년 3월 중순에서 5월 하순에 걸쳐 대일 항전을 위해 중국 팔로군이 일본군과 대치하고 있던 화북지역으로 이동했다. 총사령 김원봉을 비롯한 나머지 병력은 1942년 5월 임시정부에 합류하여 한국광복군 제1지대로 편성됐다. 이때 이종건도 광복군에 편성돼 8·15 광복 그날까지 독립운동 전선을 떠나지 않고 제1지대 본부 요원으로, 그리고 민족혁명당 감찰위원으로 조국광복과 민족독립을 위해 힘썼다.



 8·15 광복 후 이종건은 1946년 봄 그토록 그리던 조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동서냉전과 남북분단 체제 속에서 ‘민주와 평등’을 꿈꿨던 독립운동 시기의 큰 뜻을 펴지도 못한 채, 1960년 6월 19일 54세를 일기로 영면하였다. 더욱이 오늘까지도 그의 활동을 제대로 조명하지 못하고 잊혀진 독립운동가로 남아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동초 이종건 선생 일대기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충청 대표의원












이종건 선생(사진)은 일제시대 중국으로 망명해 활동한 독립운동가다. 베이징 한족동맹회 등에 소속되어 친일 밀정처단과 독립운동가 신변보호 등을 담당했다. 1931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충청도 대표의원으로도 활동했다.



 본관은 광주(廣州)이고, 호는 동초(東初), 이명(異名)은 세장(世章)이다. 충청남도 천안(天安)에서 출생하였다. 28년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중국으로 망명, 태원군관학교(太原軍官學校)를 수료했다. 31년 베이징에서 한족동맹회(韓族同盟會)에 가담, 독립운동을 방해하는 일본경찰의 밀정을 처단했다.



 그 후 상하이(上海)에서 한인독립운동청년동맹(韓人獨立運動靑年同盟)·한인청년당(韓人靑年黨)·의열단(義烈團) 등에 가담해 활동했다. 31년 10월 대한교민단(大韓僑民團) 의경대원(義警隊員)에 임명돼 출입국자의 신상파악과 독립운동가들의 신변보호 및 친일여부를 조사하는 등 밀정색출에 힘썼다.



 같은 해 12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충청도 대표의원에 선출돼 의정활동에 참여했고, 33년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난징지부(南京支部) 간부로 활동했다. 34년 중국 중앙군관학교 뤄양분교(洛陽分校)를 졸업하고, 난징에서 김구구락부회(金九俱樂部會)를 개최하는 등 독립운동가들의 유대강화를 위해 노력했다.



 또한 35년 7월 난징에서 결성된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에 참여, 36년 봄 민족혁명당 훈련단에서 군사훈련을 받았으며, 37년 7월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38년 우한·한커우 등지에서 대일전(對日戰)에 참전했다. 1942년 광복군 제1지대에 편입됐고, 44년 3월 민족혁명당 감찰위원에 선임돼 활동하다 8·15광복 후 귀국했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1930년대 정세



5당 통합한 민족혁명당 창당










천안시 수신면 속창리에 있는 이종건 선생 생가 자리.





“1935년 7월 5일 우리는 중국 수도 남경에서 5당을 통일하여 전민족군 진영―조선민족혁명당을 창립했다. 이는 수 십년 내 조선혁명통일운동의 최대 성공인 동시에, 또 국외 독립당 촉성회와 국내 신간회의 혁명적 전통의 광휘한 계승인 것이다. 조선민족혁명당은 성립 당시부터 그의 최고 목표는, 즉 일본제국주의 통치를 전복하고 조선의 민주공화국을 건립하는 것이다. 이 목표를 실현하기 위하여서는 반드시 전민족 역량을 총단결하며 또 중한 양 민족 연합항일전선을 건립하여야 하는 것이다.”



-이종건 선생이 활동한 조선민족혁명당의 창립 8주년 기념 선언에서(1943.7)-



 이종건 선생이 활동했던 30년대의 정세는 1931년 9월 만주사변과 32년 1월 상해사변을 도발한 일제가 중국 침략을 본격화하고 있었다.



 그에 따라 민족의 모든 역량을 항일 전선에 결집할 필요성이 더욱 증폭됐다. 때문에 독립운동 정당과 단체들은 항일 역량을 결집하고자 민족협동전선 형성에 노력했다. 그 결과 32년 11월 상해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의열단, 한국혁명당, 한국광복동지회 등이 민족협동전선으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을 만들었다.



 이 동맹은 ‘혁명역량의 집중과 지도의 통일로써 항일 전선의 확대 강화’를 도모하고, ‘민중의 기초 위에서 직접 군사행동’을 투쟁노선으로 설정, 반일 항전의 구심체 역할을 수행했다. 하지만 이는 가맹 단체간의 연락 협의기관으로 일종의 단체 연합적 성격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결속력과 통제력의 한계를 갖고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면서 반일 항전에 민족의 모든 역량을 집중할 수 있는 명실상부한 민족통일전선으로 단일 민족대당의 결성이 요구되고 있었다.



 이에 따라 기존의 독립운동 정당과 단체를 해소해 단일 민족대당을 창당하는 방식의 민족통일전선운동이 전개됐다. 35년 7월 남경 금릉대학에서 민족통일전선원칙 아래 상해 한국독립당(조소앙), 신한독립당(이청천), 의열단(김원봉), 조선혁명당(최동오), 대한 독립당(김규식) 등 5당 통합으로 민족혁명당의 창당이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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