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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노트] 한국 첫 동시녹음 영화 목소리가 사라진 이유

중앙일보 2011.05.28 00:06 종합 23면 지면보기






기선민 기자



80분간 어둠 속에서 소리 없는 영화를 보는 건 기묘한 경험이었다. 배우들은 말하고 외쳤지만 관객은 들을 수 없었다. 26일 서울 상암동 한국영상자료원(원장 이병훈)에서 열린 고 김기영 감독(1919∼98)의 ‘죽엄의 상자’ 상영회에서였다.



‘죽엄의 상자’는 ‘하녀’ ‘충녀’ ‘화녀’ 등으로 독특한 표현주의 세계를 구축했던 거장 감독의 데뷔작. 그렇다 해도 배우의 목소리가 없는 영화를 보는 건 고역이었다. ‘해방 이후 한국영화 최초의 동시녹음’이라는 타이틀이 무색했다.









1955년작 ‘죽엄의 상자’ 홍보용 팸플릿. 당시엔 ‘죽엄’과 ‘주검’을 혼용했다. 영상자료원에선 엔딩 크레디트에 따라 ‘죽엄’으로 표기했다.



 강효실·최무룡 주연의 이 영화는 남한에서 정체를 숨기고 활동하는 빨치산과 경찰의 대립을 그린 반공영화다. 유실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지난해 말 영상자료원이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 소장된 사실을 발견해 원본을 복사해왔다. ‘죽엄의 상자’가 ‘무성영화 아닌 무성영화’ 신세가 된 건 사운드가 사라졌기 때문. 6월 4, 9일 두 차례 일반 공개되지만, 가치를 음미할 수 있을지는 그래서 미지수다.



 그래도 의미는 크다. 1950~60년대 감독들의 데뷔작 중 유일하게 발굴된 작품이다. 신상옥 감독의 ‘악야’, 유현목 감독의 ‘교차로’, 김수용 감독의 ‘공처가’, 이만희 감독의 ‘주마등’, 이성구 감독의 ‘젊은 표정’ 등에서 지금 볼 수 있는 건 한 편도 없다. 일제 강점기 영화도 남아있지 않다. 영상자료원 소장작 중 가장 오래된 건 1934년작 ‘청춘의 십자로’다.



 이병훈 원장은 “30~40년대 한국영화 중 영상자료원이 소장한 건 20편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최근 김태용 감독이 현빈·탕웨이(湯唯·탕유) 주연으로 리메이크한 ‘만추’도 필름이 사라져 현존 영화인 중에 본 사람이 거의 없다.



 ‘죽엄의 상자’는 영상자산 보존의 척박한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문화콘텐트의 가치에 대한 몰이해가 가장 큰 원인이다. 영상자료원의 별명이 ‘필름고아원’이던 시절도 있었다. 연구자들이 자료를 찾으러 왔다 허탕치는 일이 잦아서였다. 옛 영화들이 본격 발굴된 건 2000년대 들어서다. 영상자료원의 고전영화 수집·복원·보존에 할당된 한 해 예산은 25억원 가량. 이중 절반 정도가 필름 보존시설 유지비다. 10억원을 간신히 넘는 저예산영화 수준의 예산이 ‘고전 찾기’에 쓰이는 셈이다.



 지난해 영상자료원이 세계영화재단의 지원으로 복원한 ‘하녀’ DVD는 2400장이 팔려나가는 ‘대박’을 기록했다. 한국 고전영화에 대한 수요는 점점 늘어나고 있다. 문화강국이 구호로만 되는 건 아니다.



기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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