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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위 1%의 비밀스러운 쇼핑 장소

중앙선데이 2011.05.22 0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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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관 위의 명품관, 호텔 아케이드







서울 장충동 신라호텔 지하 1층 아케이드. 요일이나 시간대에 관계없이 한산하다. 하지만 이곳을 찾는 고객들은 최고의 제품에 아낌없이 투자하는 특성이 있어 매출은 백화점 명품관에 뒤지지 않는다. 최정동 기자







1887년 문을 연 싱가포르의 래플스 호텔은 유서 깊은 역사와 아름다운 건축 양식으로 싱가포르 최고의 랜드마크로 꼽힌다. 호텔 로비에는 투숙객이 아니면 들어갈 수 없지만, 아케이드만큼은 누구에게나 개방된다. 고풍스러운 흰색의 호텔 건물을 에워싼 아케이드에는 1, 2층에 걸쳐 루이뷔통, 티파니, 예거 르쿨트르, 몰튼 브라운 등 명품브랜드 매장과 부티크 숍, 레스토랑이 자리 잡고 있다. 싱가포르에서 세련되고 우아한 쇼핑을 즐기고자 한다면 단연 첫째로 손꼽히는 장소가 바로 래플스 호텔 아케이드다.



호텔 서비스의 핵심은 고급스러움과 프라이버시 보호다. 호텔 아케이드 쇼핑의 특징도 이 두 가지로 요약된다. 최고의 제품을 남의 시선에 구애받지 않고 쇼핑할 수 있는 장소인 것이다. 국내에선 서울 장충동의 신라호텔과 한남동의 그랜드하얏트 호텔 아케이드가 VVIP의 쇼핑공간으로 꼽힌다.



‘아는 사람만 아는’ 명품 브랜드 즐비

신라호텔 지하 1층 아케이드에는 19개 브랜드가 입점해 있다. 에르메스처럼 널리 알려진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아는 사람만 아는’ 브랜드다. 일본 디자이너 이세이 미야케의 최고급 브랜드인 하트(HAAT), ‘이탈리아의 에르메스’로 불리는 수공예 가죽 브랜드 발렉스트라(VALEXTRA), 최고급 악어백을 만드는 콜롬보(COLOMBO), 150년 전통의 신발 브랜드 존롭(JHON LOBB) 등이다. 발렉스트라는 송아지 가죽 가방이 200만~500만원대, 콜롬보는 2000만원이 넘는 핸드백을 판매한다. 초고가지만 최고의 품질을 갖췄고, 소수의 사람만 갖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부자들의 구매 패턴에 부합하는 특성이다.



삼성증권 이재경 상무는 “VVIP들의 중요한 기준은 희소성”이라며 “일반화된 명품은 더 이상 명품이 아니다”고 말했다. “벤츠나 BMW를 타던 부자들이 벤틀리 등으로 갈아탄 것처럼 소비가 한층 고급화됐다”는 것이다. 그는 또 “아무거나 사지 않지만 얼마를 더 쓰는지 연연하지도 않는다”며 “투자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가격에 구애받지 않는 경향이 있다”고 덧붙였다.



여기서 취급하는 브랜드는 로고를 일부러 드러내지 않는다. 유행에 민감하지도 않다. 가방 등 가죽제품은 보통의 명품 브랜드와 달리 로고를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의류는 모노톤으로 차분한 색조를 띤다. “고객들이 로고를 통해 자신의 지위를 보여주는 걸 원하지 않는다”고 신라호텔 하트 브랜드의 유지희 매니저는 설명했다.



그래서 호텔은 너무 트렌디한 브랜드나 매스티지(중저가 명품) 브랜드는 지양하고, 가능하면 국내 최초 매장이나 플래그십 매장 입점을 원하는 브랜드를 유치한다. 최고급 이미지와 희소성을 동시에 지키기 위한 전략이다.



그랜드하얏트 호텔에는 남성 의류 브랜드인 브리오니와 에르메네질도 제냐, 바쉐론콘스탄틴 시계, 프랑스의 수공 크리스털 브랜드인 바카라 매장 등이 있다. 모두 세계 최고 수준으로 손꼽히는 브랜드다. 그랜드하얏트 호텔의 나정화 대리는 “호텔을 이용하는 고객의 취향과 소비 패턴에 따라 선정한 브랜드”라며 “외국인의 방문이 잦은 호텔의 특성을 감안해 글로벌 브랜드가 들어오게 됐다”고 했다.









42년 경력의 이탈리아 장인 파울로 팔룸보가 최근 신라호텔 키톤 매장에서 맞춤양복을 만들기 위해 고객의 사이즈를 재고 있다. 최정동 기자



격식 중시하는 ‘큰손’들이 주요 고객

평일 오전·오후, 그리고 주말 낮에 신라호텔 아케이드를 찾았을 때마다 로비를 거니는 고객이 10명을 넘지 않았다. 나도연 주임은 “백화점처럼 고객이 몰리는 요일, 시간대가 없다”고 말했다. 월평균 이용 고객은 약 8300명. 드나드는 사람의 숫자다. 신세계백화점 명품관과 롯데백화점 애비뉴엘의 월평균 구매고객의 절반 수준밖에 안 된다.



이래서 장사가 될까 싶지만 소수의 VVIP가 구매하는 금액은 상상을 넘어선다. “5000만원짜리 맞춤 양복을 한 번에 3벌씩 맞추는 고객도 있다”는 게 신라호텔 관계자의 전언이다. 매장 직원들도 “양보다 질”이라고 한다. 백화점에서 상위 1% 고객이 전체 매출의 15~20%를 차지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래서 ‘백화점 매장에 비해 매출이 떨어지지 않는다’ ‘어떤 브랜드가 매장 10개를 갖고 있다면 이 중 아케이드의 매출이 상위권에 든다’는 것이다.



‘큰손’ 고객들은 격식과 전통을 중시한다. 이는 신라 아케이드의 한복판에 자리 잡은 ‘전통한복 김영석’의 고객 특성이기도 하다. 여기서 한복 한 벌은 130만원 선. 실크 블라우스 하나에 수백만원 하는 수입 브랜드에 비하면 저렴하다. 그렇다고 누구나 사 입지는 않는다. 김영석 디자이너는 “돈이 많다고 입는 것도 아니고, 보통 사람은 일상에서 한복을 입을 일이 거의 없다”며 “격식을 중요하게 여기는 집안의 고객들이 철마다 새 한복을 장만하러 온다”고 말했다.



나 주임은 “백화점 명품관이 상위 3%를 대상으로 한다면 아케이드는 1% 고객들이 오는 곳”이라고 설명했다. 주로 재력이 받쳐주고 남에 눈에 띄기를 원하지 않는 기업 CEO, 재벌가 인사, 연예인 등이 주요 고객이다. 이들은 상당수가 피트니스 회원권을 갖고 있는 호텔 고객이기도 하다. 나 주임은 “CEO들은 운동이나 식사 후 쇼핑까지 할 수 있어 효율적인 시간관리가 가능하다는 점 때문에 선호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프라이버시 보호 최우선…별실서 구매 상담

호텔 아케이드는 최고 고객에게 최고 제품을 팔면서 최고의 서비스를 선보인다. 대표적인 게 맞춤이다. 브리오니나 키톤 등 의류 브랜드의 MTM(Made to Measure) 서비스다. 이탈리아의 장인이 방문해 고객들의 사이즈를 측정하고 맞춤 의상을 제작한다. 키톤은 1년에 두 번 MTM 행사를 여는데, 수트뿐 아니라 블레이저, 점퍼도 맞춤이 가능하다. 존롭은 넉 달에 한 번씩 프랑스에서 장인이 방한한다. 키톤의 김정은 매니저는 “백화점 매장에서도 같은 서비스를 제공하지만 눈에 덜 띄고자 하는 고객들은 아케이드를 선호한다”며 “고객이 원하는 경우 집으로 방문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수트 한 벌이 1300만원대에서 시작할 정도로 고가지만 장인이 방한할 때마다 옷을 맞추는 단골이 적지 않다.



오데마 피게와 지라드-페르고 시계 매장엔 별실이 마련돼 있다. 고객들이 편안하게 시계를 보고 구매 상담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배려다. 또 직원과 손님이 공유하는 일종의 규칙도 있다. 문이 닫혀 있는 매장에는 절대로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보통은 모든 매장이 문을 열어두지만 고객이 특정 브랜드에서 혼자 쇼핑을 하고 싶어할 땐 문을 닫아 다른 고객의 출입을 제한한다. 이때는 밖에 있는 고객도 들어가지 않는 것이 암묵적인 룰이다.



최고급 이미지를 쌓을 수 있기 때문에 명품 브랜드들은 노출 기회가 많은 백화점보다 아케이드를 선호하기도 한다. 발렉스트라는 2009년 7월 신라호텔에 입점하고 1년여가 지나서야 갤러리아백화점에 두 번째 매장을 열었다. 하트와 존롭도 신라호텔에서 먼저 시작했다. 하트의 유지희 매니저는 “국내에서 시장을 확대하기 위한 전략”이라고 설명했다. “최상위 고객 사이에서 이름이 알려지면 피라미드처럼 고객층이 확대된다”는 것이다. 그는 “명품일수록 어느 고객층을 대상으로 시작하느냐가 중요한데, 아케이드만큼 좋은 장소는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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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희 기자 hongh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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