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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약속 지키라고 장 비서가 애들 아빠 설득하세요”

중앙선데이 2011.05.22 0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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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민 전 의원 인간 金大中이야기<13>] DJ의 동지이자 비판자 이희호 여사







2008년 여름 이희호 여사가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한강시민공원 코스모스 단지에서 활짝 웃고 있다. DJ가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뒤 함께 지낸 시간이 이 여사의 일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였다. [중앙포토]



정치인의 성패에서 배우자의 역할은 얼마나 될까. “매우 크지만 시대와 사람에 따라 다르다”는 정도의 대답이 나올 것이다. 제42대 미국 대통령인 빌 클린턴과 오바마 정부의 국무장관인 힐러리 부부가 대표 사례일 수 있다. 힐러리를 만나지 않았다면 클린턴은 대통령이 될 수 있었을까. 반대로 클린턴이 없었어도 힐러리는 지금 같은 정치거물이 됐을까. 둘 다 아닐 것이다. 그러니 이들은 부부일 뿐 아니라 서로의 정치적 동지인 셈이다.



‘부부이자 정치적 동지.’ 한국에서 이 표현이 가장 잘 어울리는 건 누굴까. 나는 주저 없이 “김대중과 이희호”라고 말하겠다. 사람들은 흔히 DJ의 동교동 자택 문패에 두 분의 이름이 함께 적혀 있는 것만 얘기한다. 하지만 ‘제15대 대통령 김대중’을 만들어 내는 데 가장 큰 공로자는 바로 이희호였다. 동시에 DJ에 대한 가장 거리낌 없는 비판자도 그였다.



1995년 6월 말께 신문마다 DJ의 정계복귀를 기정사실화하고 있을 때였다. 동교동 자택에서 이 여사가 나를 불렀다. “신문에 애들 아빠가 정계복귀를 한다는 기사가 나가고 있는데 장 비서는 알고 있나요.” “네, 사모님.” “그럼 국민들이 어떻게 볼지도 알겠네요.” “예, 대충 알고 있습니다.” “국민들이 좋아할까요?” 나는 할 말이 없었다. 지난 호에 나간 대로 당시 중앙일보 여론조사에 따르면 DJ의 정계복귀는 반대가 70% 이상이었다. 하지만 정치를 향한 DJ의 집념과 의지를 어떻게 막는다는 말인가.



“왜 말을 안 해요. 국민들이 좋아해요?” “….” “아니, 평소에는 애들 아버지에게 바른말 잘하더니 왜 저 양반 정계복귀에 대해서는 장 비서가 침묵만 하고 있나요?”



이렇게 심한 꾸지람은 처음이었다. 이 여사는 자신이 마흔두 살 때 낳은 막내 홍걸씨와 동갑인 나를 아들처럼 대했다. 이 여사가 하도 챙겨주니 내가 DJ 자택 비서가 된 게 이 여사의 친인척이어서라는 소문도 났었다. 그날 이후 이 여사는 수시로 나에게 “장 비서가 애들 아빠한테 국민하고 약속을 어기면 안 된다고 바른말을 하라”고 채근했다. 본인도 계속 반대의사를 표시했다. DJ는 드골과 닉슨을 얘기하며 설득했다고 한다. 드골 사례는 DJ가 정계은퇴를 한 지 사흘 만인 92년 12월 21일 내가 올린 ‘정계복귀 프로젝트’에 들어있는 내용이다. 하지만 닉슨은 뭘까. 닉슨은 60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떨어졌고 2년 뒤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 나갔는데 거기서도 패배했다. 모두들 닉슨은 끝났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멀리 뉴욕주로 가 변호사 생활을 하면서 권토중래를 노렸고 68년 대선에서 승리했다. 이 사례는 DJ가 영국에 있을 때 재미교포인 심리학 교수가 찾아와 출마를 권하며 알려준 것이라고 한다. 아무리 반대해도 DJ의 정계복귀가 기정사실이 되자 어느 날 이 여사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젠 케세라세라네요.” 이탈리아 여자가수가 부르는 노래에 나오는 말인데 ‘어쩔 수 없다, 될 대로 되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래도 부창부수(夫唱婦隨)인가 보다. DJ의 정계복귀에 대해 언론이 맹렬히 비난하자 이 여사는 결국 남편 감싸기에 나섰다. “아니, 군인들이 정치개입하고 헌법도 다 뜯어고치고 할 때는 가만히 있던 언론이 해도 너무하네요.”



정계복귀를 놓고 벌어졌던 DJ와 이희호 여사의 갈등은 두 사람의 성격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DJ는 철저한 현실주의자였다. 상황이 바뀌면 논리도 거기에 맞춰 바꿨다. 한꺼번이 아니라 조금씩, 천천히 바꿨다. 반면에 이희호는 원칙주의자에 가까웠다. 한번 마음 먹으면 어지간해선 흔들리지 않았다. 미국 유학을 다녀온 여성운동의 리더급 인사였던 그가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정치규제에 묶이고 애 둘을 남기고 사별한 아내 때문에 실의에 젖어있던 DJ와 결혼한 것도 바로 그런 성격 때문이었을 테니 그게 인생인가 보다.



이희호 여사는 1922년 9월 21일 서울 수송동 외가에서 태어났다. 6남2녀 중 넷째였고 장녀였다. 아버지는 세브란스 의전을 나온 의사였다. 어머니는 그가 열아홉 살 때 돌아가셨다. 이희호의 고집을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가 있다. 그는 1936년 이화고녀(여고)에 입학해 기숙사 생활을 했는데 2학년 때 반장이었다. 한데 38년에 일제가 조선어 금지령을 내렸다. 화가 난 이희호는 일본어를 거의 공부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 나이 또래에 비해 일본어를 잘 못한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은 최명희씨의 『혼불』이다. 그 책에 잊혀져 가는 우리 고유의 토속어가 많이 들어 있다는 이유다. 이화여고를 졸업한 뒤 이화여대를 다녔고 다시 서울대 사범대에 들어갔다.



이희호는 DJ를 언제 처음 만났을까. 전쟁통인 51년 부산에서다. 이희호는 당시 여자청년단을 만들어 활동 중이었는데 젊은이들의 모임인 면우회(勉友會)라는 곳에 DJ가 가끔씩 들렀다. DJ는 기혼이었고, 정치가를 꿈꾸는 청년 실업가였다. 하지만 토론회에 오면 자기 말은 안 하고 남들 얘기를 주로 들었다고 한다. 두 사람이 다시 만난 건 그로부터 8년 뒤인 59년 서울 종로에서였다. 그동안 여러 변화가 있었다. 이희호는 32세가 되던 54년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내슈빌 스칼릿대에서 사회학 석사를 받고 4년 만에 귀국했다. DJ는 여러 차례 선거에서 떨어졌고 상처(喪妻)까지 한 상황이었다. 두 사람은 안부만 묻고는 헤어졌다.



61년 5월 14일 인제 보궐선거에서 처음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됐던 DJ는 이틀 뒤 터진 5·16으로 배지도 달아보지 못하고 다시 실업자가 됐다. 이때부터 DJ는 YWCA 총무로 있던 이희호를 만나러 명동으로 오곤 했다. 데이트 비용은 주로 이희호가 댔다. DJ는 62년 3월 쌀쌀한 날씨에 파고다공원에서 정치연설 같은 청혼을 했다.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가진 게 없다. 하지만 나에게는 원대한 꿈이 있다. 이 땅에 참된 민주주의를 꽃 피우고 국민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는 것이다. 나는 당신을 필요로 하며 나와 아이들을 돌봐주기 바란다. 당신을 사랑한다.”



주변에선 펄펄 뛰며 반대했다. 여성 운동의 대표주자로 키우려는데 덜컥 야당 정치인에게 시집을 가겠다니 그럴 만했다. 그런데 이희호는 눈 하나 깜짝 안 했다. “나는 이미 61년 말에 그 사람과 결혼하기로 마음을 정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워낙 형편이 어려우니 청혼을 못하더라고요.” 한번은 왜 DJ와 결혼할 결심을 했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대답이 걸작이었다. “젊었을 때는 애들 아빠가 저렇게 뚱뚱하지도 않았고 잘생겼었어요. 얼마나 멋있었는데요. 아주 똑똑한 사람이었어요. 꿈이 큰 남자였기 때문에 내가 도와서 밑거름이 되고 싶었지요.”



온양 온천으로 신혼여행을 다녀온 뒤 두 사람은 대신동에서 30만원짜리 전세로 살림을 시작했다. 이희호는 YWCA 총무를 하면서 이화여대에 강의도 나갔다. 하지만 63년 11월 DJ가 목포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면서부터는 야당 정치인 아내로서의 고단한 삶을 시작하는 것이다.



DJ가 자신의 이상적 아내관을 밝힌 적이 있었다. ‘헌신하되 간섭하지 않고 기대하지 않고 강요하지 않고 기다리는 아내’라고. 이 여사는 “그런 점에서 보자면 나는 그의 배우자로 적합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나는 20여 년 넘게 가까이서 지켜봤지만 두 분이 목소리 높여 다투는 걸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이 여사가 싫은 소리를 하면 DJ는 대꾸를 안 하고 밖으로 피해 버린다. 반대로 DJ가 화를 내면 이번엔 이 여사가 입을 다문다. 그러니 본격적인 싸움이 벌어질 수가 없는 것이다.



이희호 여사는 감정표현을 거의 하지 않는다. 서울대 사범대에 다닐 땐 별명이 다스(das=중성을 표시하는 독일어 정관사)였다고 한다. DJ를 ‘여보’니 ‘당신’이니 하고 부르지도 않는다. 호칭은 ‘애들 아빠’ 아니면 ‘저기요’다. 하지만 2009년 여름 DJ가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했을 때 혈액순환이 안 돼 손이 차가워지자 이 여사는 털장갑을 짜 남편의 손을 감쌌다. DJ가 신장 투석을 받을 때면 몇 시간씩 꼬박 옆에서 지켜보면서 노래를 불러주고, 이야기를 해주곤 했다.



정치판에 있다 보면, 특히 비서를 하다 보면 보스보다도 ‘사모님 등쌀’에 골치 아픈 경우가 많다. 잘나가던 정치인이 부인 때문에 욕먹는 경우도 숱하다. 하지만 내가 아는 한 적어도 이희호의 처신 때문에 DJ가 곤란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이희호가 애송하는 성경 구절은 이사야 41장10절이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내가 네 하나님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그런 종교적 힘 때문이었을까. 한평생 롤러코스터처럼 극과 극을 오가며 산 DJ 곁에서 이희호는 딱 세 번 울었다고 한다. 첫 번째는 DJ가 도쿄에서 납치됐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두 번째는 정계은퇴 선언을 했을 때, 세 번째는 DJ가 서거했을 때다.



매주 화요일이면 동작동 DJ의 묘소에는 이 여사와 동교동 식구들이 모인다. 해외에 나가는 등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거른 적이 없다. 이 여사는 항상 검은 옷을 입고 와 참배한 뒤 20~25분간 혼자 가만히 앉아 있는다. 아마도 DJ와 마음속으로 대화를 나누는 것일 게다. 여성운동가에서 야당 투사의 아내로 변신한 뒤 망명생활을 하거나 감옥에 갇혀 있는 남편을 뒷바라지하고, 대통령 영부인과 노벨수상자의 아내가 되는 영광도 누린 그의 삶은 그 자체가 한편의 드라마다. 이희호가 없었으면 DJ도 없었을 것이다. ‘인간 김대중 이야기’의 한 챕터가 이희호 여사에게 바쳐져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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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김종혁 중앙SUNDAY 편집국장 kimch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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