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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유한 ‘캐비아 좌파’ … 레드에서 핑크로 성향 바꿔

중앙선데이 2011.05.22 02:18 219호 32면 지면보기
요즘 언론에 자주 거론되는 국제 명사가 있다. 프랑스 사회당 정치인이며, 전 국제통화기금(IMF) 총재 도미니크 스트로스칸(Dominique Strauss-kahn·사진)이다. 약칭 DSK로 부른다. 스트로스칸은 1949년 파리 근교 부촌인 뇌이에서 태어났다. 재력가 아버지는 독일계, 어머니는 러시아-튀니지계 유대인이다. 그는 51년부터 10년간 모로코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다 60년대 초 파리로 돌아온다. 71년 명문인 고등상업대학(HEC)을 졸업하고 이어 파리 10대학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는다. 이후 강사·교수로 모교를 비롯한 몇몇 대학에서 경제학을 강의한다. 통화와 수리경제 전문가인 그는 82년 정부기관인 경제계획위원회에서 자문관으로 일했다. 86년 정계에 투신해 하원의원이 된다.

박재선의 유대인 이야기 암초에 걸린 도미니크 스트로스칸

한때 공산당 성향이었던 DSK는 76년 사회주의자로 변신한다. ‘붉은색’을 ‘분홍색’으로 탈색한 것이다. 91년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은 그를 산업·통상장관에 임명했다. 이후부터는 탄탄대로의 출세가도를 달렸다. 6선 하원의원, 사회당 전국 총서기, 경제·재무장관, IMF 총재 등이다. DSK는 세 번 결혼했다. 현 부인은 유대인인 프랑스 인기 TV앵커 안 생클레르이다. 그녀도 재혼이다.

허리 아래 일엔 관대한 프랑스
여러 유형의 유럽 사회민주주의 정당 중 프랑스 사회당은 독특한 면이 있다. 적지 않은 구성원이 귀족의 후예 또는 부유한 집안 자제 그리고 영재교육기관 출신이다. 그래서 상당수 프랑스 사회당 인사 중에는 DSK처럼 ‘캐비아 좌파(Gauche Caviar)’로 불리는 인물이 있다. ‘샴페인 좌파’와 같은 의미다. 카스피해에서 조금 나오는 철갑상어 알 ‘캐비아’와 샴페인은 부유층 호사의 상징이다.

이들도 나름대로의 변은 있다. 보통 어려운 환경에서 성장한 사람들은 불특정 다수에 대한 적개심을 갖고 있다. 고달팠던 삶의 원인을 잘사는 타인에게 돌린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이 사회에서 성공하면 내재한 복수심이 발동해 중요한 결정을 그르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캐비아 좌파들은 이런 말을 한다. “그래도 유복하게 자란 사람들이 좌파를 하면 성장기에 굴곡을 겪은 사람보다 건전한 사고와 판단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궤변 같지만 일면 수긍 가는 점도 있다. 한국인은 유독 ‘입지전’ 또는 ‘자수성가형’ 인물을 좋아하지만 프랑스는 다르다. 오랜 중앙집권적 왕정과 귀족정치를 해 온 탓에 출신성분이 좋은 소수 엘리트가 국가를 지배하는 것에 대해 커다란 거부감을 보이지 않는다. 이 엘리트들은 표면적으로는 좌·우파로 나눠져 있지만 내면적으로는 모두 권력주체로서 동질감을 느낀다.

DSK는 지난 15일 뉴욕의 한 프랑스계 호텔에서 여성 객실 청소원을 성폭행하려다 미수에 그친 뒤 체포되어 미국에서 재판을 받고 있다. 거칠 것 없었던 그의 정치 역정에 치명적인 적신호가 켜졌다. 그는 미국에서 가장 유능한 형사사건 전문 유대인 변호사를 선임했지만 그래도 유죄가 입증되면 중벌을 피하기 어렵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처럼 스트로스칸도 충동적 성중독자로 알려져 있다. 전력도 있다. 2002년에는 인터뷰하러 온 여성작가를 추행했다. 2008년에도 IMF 아프리카 담당 헝가리 여성과의 관계로 한동안 시끄러웠다.

청교도적인 관습이 짙은 미국과는 달리 마초 성향이 강한 프랑스에서는 공인의 불륜 스캔들을 이슈화하는 일이 없다. 절대 보호 대상인 사생활로 간주한다. 따라서 이런 문제로 공인의 사회적 지위가 위협받은 적도 없다. 과거 미테랑 대통령도 재임 중 혼외정사로 얻은 딸이 공개됐지만 대다수 프랑스 언론은 이를 폭로한 파리 마치지를 맹공격했지 미테랑의 불륜은 거론하지 않았다. 범상한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귀여운 과오(P<00E9>ch<00E9> Mignon)’는 모두에게 해당될 수 있는 것이므로 덮고 가자는 것이다. 잠재적 공범의식이 작용하는 듯도 하다.

대선 여론조사서 사르코지 추월
DSK는 지난 프랑스 대선 때 사회당 후보 선출전에서 낙마했다. 그는 이후 미국 유대 금융계를 비롯한 국제 실세의 추천으로, 통상 유럽 인사에게 돌아가는 IMF 총재 자리를 맡았다. 그는 국제적 지도자로 체급을 높여 내년 대선에서 사회당 후보로 출마하려 했다. 이번 사건이 발생하기 전까지만 해도 여론조사에서 그의 지지율은 재선에 도전하는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보다 월등하게 높았다. 17년 만에 재집권을 꿈꾸는 프랑스 사회당도 DSK를 잠정 후보로 점찍어 놓았다.

그래서 이번 사건을 음모로 보는 시각도 적지 않다. 정보기관 공작설도 나돈다. 이런 견해도 있다. 얼마 전부터 DSK에게는 두 부류의 적이 생겼다. 하나는 내년 프랑스 대선에서 격돌할 사르코지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IMF 총재로서 그가 추진한 일련의 급진적 개혁에 반감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는 미국 금융계 중심의 ‘브레턴우즈’ IMF 체제를 신흥경제국 주도의 주요 20개국(G20)으로 확대시켰다. 많은 동료 유대인의 아성인 국제금융계의 오랜 기득권을 위협한 것이다. 이번 사건이 스트로스칸의 자제력 잃은 동물적 충동으로 일어난 범죄라 해도, 공인으로서 그의 야심이 후원자를 적으로 돌린 것 또한 사실이다. 그래서 지난날의 지원세력 모두가 이제는 그를 매장시키기로 합의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건이 미국이 아닌 프랑스에서 일어났어도 파장이 같았을 것인지 의문도 제기됐다. 그런데 이런 종류의 음모론은 개연성은 있어 보이나 실체적 물증은 없다는 게 항상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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