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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의 적은 친구 … 마오 “싸워도 좋으니 닉슨 만나겠다”

중앙선데이 2011.05.22 02:15 219호 33면 지면보기
1970년 11월 10일 파키스탄 대통령 아히야 칸(왼쪽 앞에서 셋째)의 베이징 방문 목적은 미국 대통령 닉슨의 밀사파견 의향을 중국에 전달하는 것이었다. 방문 이튿날, 인민대회당에서 거행된 저우언라이(오른쪽 앞에서 셋째)와의 회담은 한담 수준이었다. 오른쪽 앞에서 둘째가 예젠잉, 넷째가 탕원성. 맨 끝 안경 쓴 사람이 지자오주. [김명호 제공]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중·소 관계가 험악해지기 시작했다. 69년 3월 초 중·소 양국의 변방군(邊防軍)이 우수리강변에 있는 전바오다오(珍寶島·진보도)에서 무장 충돌했다. 69년 6월 7일 마오쩌둥은 천이(陳毅·진의), 쉬향첸(徐向前·서향전), 네룽쩐(<8076>榮臻·섭영진), 예젠잉(葉劍英·엽검영) 등 4명의 원수(元帥)에게 국제정세 분석과 전쟁 발발 가능성 및 국방 전략을 논의하라고 지시했다. 문혁을 일으켜 전국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어 놨지만, 국가의 안전은 그것과 별개였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18>

원수들은 6차례 머리를 맞댔다. 69년 7월 11일 “미·소 양국 간의 모순은 우리가 상상했던 것 이상이다. 유럽과 중동지역에서 특히 심하다. 두 나라가 연합하거나, 소련 단독으로 중국을 공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보고서를 당 중앙에 제출했다. 9월 17일 두 번째 보고서를 만들었다. “소련이 중국 침략 계획을 세웠을 경우 가장 우려하는 것은 중국과 미국이 연합해서 소련에 대항하는 것이다.” 10차례에 걸친 토론 결과였다.

천이의 구두건의는 보다 구체적이었다. “가장 큰 적은 소련이다. 우리의 안전을 위협하는 정도가 미국보다 크다. 소련과 미국의 모순을 틈타 중·미 관계를 타개할 필요가 있다. 현재 상황은 우리에게 유리하다. 닉슨도 취임 직후부터 중국을 방문하고 싶어한다.” 원수들의 분석과 전략은 중공 중앙과 마오쩌둥의 대미 정책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듬해 6월 중공 중앙은 마오쩌둥 명의로 스위스에 있던 미국 기자 에드거 스노 부부를 초청했다. 북한과 탁구시합이 벌어지는 날 수도체육관에서 저우언라이를 만난 스노는 마오와의 면담을 요청했다. 10월 1일 저우언라이는 건국기념일 행사에 참석한 스노를 마오쩌둥 옆으로 인도했다. 통역을 맡았던 지자오주(冀朝鑄·기조주, 전 영국대사)에 의하면 서로 별다른 대화는 나누지 않았다고 한다.

이튿날 신화사(新華社)는 마오와 스노가 천안문 성루에서 다정하게 얘기하는 장면을 전 세계에 전송했다. 미국의 신경을 슬쩍 건드려 본 마오의 이날 전략은 완전 실패였다. 미국 쪽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마오가 보낸 신호를 제대로 읽지 못했다. 마오는 스노를 다시 만났다. 5시간 가까이 얘기를 나눴다. “나는 민주당을 싫어한다. 닉슨이 대통령이 돼서 기분이 좋다. 베이징에 오고 싶으면 남들 몰래 오라고 해라. 대통령 신분으로 와도 좋고, 그냥 여행객으로 와도 좋다. 억지로 권할 필요는 없다.” 이어서 “닉슨이 온다면, 나도 만나서 얘기를 나누고 싶다. 얘기를 하다가 뭔가 성사가 돼도 좋고 안 돼도 좋다. 싸워도 좋다. 한마디로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 다 좋다.”

중공은 두 사람의 대화기록을 중앙문건 형식으로 전국의 당 지부에 배포했다. 공장과 농촌으로 쫓겨갔던 미국 문제 전문가들을 속속 베이징으로 불러들였다. 몇 달 후, 닉슨은 루마니아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중국을 “People’s Republic of China”라고 호칭했다.

11월 10일, 파키스탄 대통령 아히야 칸이 베이징을 방문했다. 회담이 끝날 무렵 “총리와 사사로운 얘기를 나누고 싶다”며 통역 외에는 자리를 피해 달라고 했다. 뭔가 심상치 않았다. 저우언라이는 지자오주와 탕원성(唐聞生·당문생)만 데리고 구석방으로 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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