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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 굶고 총알 다 떨어져 소리 지르며 중공군과 싸웠다”

중앙선데이 2011.05.22 01:34 219호 3면 지면보기
1951년 5월 18~20일 ‘용문산 전투’는 6·25의 흐름을 바꿨다. 한국군 6사단에 패한 중공군은 더 이상 공세를 펴지 못했다. 당시 6사단 2연대 1대대 1중대 선임 소위로 전투를 벌였던 전제현(82·오른쪽)씨가 김영희 중앙일보 대기자(왼쪽)와 60년 전의 격전지를 찾았다. 전 소위가 가리키는 저 뒤쪽 산줄기가 2연대 1대대가 버텼던 장락산과 559고지다. 중공군이 건넜던 고지 앞 홍천강엔 지금 보트 선착장이 있다. 홍천강=조용철 기자
다짜고짜 쌍소리. “야~이~ 사람 깍데기(껍데기)만 뒤집어 쓴 개XX들아. 다 나가 죽으라우. 너희 때문에 사단이 망하고 유엔군이 수십㎞나 후퇴했어.” 51년 5월 13일쯤 용문산 남쪽의 마른 논바닥. 사창리 전투에서 제일 먼저 후퇴했던 2연대 1대대 장교와 사병이 늘어 섰다. 장도영 6사단장은 전체 앞에선 “차후 전투에서 오명을 씻으라”고 훈시했지만 따로 집합시킨 장교들에겐 달랐다. 욕을 퍼부었다. 패배 책임 때문에 연대장과 1 대대장이 즉석에서 헌병에 압송된 직후. 살벌했다. 남은 1대대 장교는 35명 중 13~14명, 사병도 500명에서 150명으로 줄었다. 전멸이었다.

용문산 전투 60주년 김영희 대기자와 당시 소대장 전제현씨가 찾은 현장

한 달 전인 4월 22일 사창리 화악산 일대를 공격하던 6사단은 중공군 9병단의 맹공에 패퇴했다. 상처는 컸다. 겨우 중공군 공포감에서 벗어날 찰나 찬물을 끼얹은 것이었다. 중공군의 공세에 시달리던 미군은 두어 달 전인 2월 원주와 인근 지평리 전투에서 승리했다. 그 의미를 퓰리처상 수상작가 데이비드 헬버스템은 저서 콜디스트 윈터에서 이렇게 썼다.

“중국 역사가 천첸은 지평리 전투로 모든 게 달라졌다. 그때까지 중공군은 모든 상황이 유리하다고 믿었다. 최종 승리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펑더화이(인민지원군 총사령관)는 큰 충격에 빠졌다.”
그러던 차에 한국군의 사창리 대패 뉴스가 날아든 것이었다. 당시 막 부임한 제임스 밴플리트 8군 사령관은 장도영의 면전에서 “당신, 전쟁이 뭔지 알아”라고 쏘아붙였다. 역습을 위해 이동하던 미해병 1사단 장병은 침을 뱉으며 “갓뎀 블루스타(God damn BlueStar)”라고 욕했다. 블루스타는 6사단 마크였다.

콜디스트 윈터에는 ‘한국군은 중공군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 커 중공군이 공격을 시작하려 하자 이미 해체 수준에 이르렀다…. 어떤 연대에선 500여 명의 군인이 무기를 든 채 달아났다’와 같은 무력한 한국군의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2월 11일 원주 전투 전초전에서도 미군과 함께 작전하던 한국군 8사단은 ‘눈 녹듯’ 무너지고 사상자가 1만 명이나 됐다(콜디스트 윈터). 4월 사창리 패배는 한국군의 무력증을 또 확인하는 것이었다.

용문산 전투 직전 6사단 장병들은 철모에 붉은 색으로 ‘결사’라 쓰고 머리띠도 만들었다.
장 사단장은 2연대 전체를 전진 배치했다. 1대대는 홍천강·북한강 일대를 내려다보는 559고지, 2대대는 서쪽의 울업산(381m), 3대대는 353고지로 보냈다. 죽으라는 거였다. 전 소위는 몰랐지만 당시 장락산 앞 홍천강 일대론 중공군 19병단 예하 63군 3개 사단이 밀려들고 있었다.

사단장은 그랬다. “저기 도요타 트럭 두 대가 있다. 너희들이 사창리에 남기고 온 사단 트럭과 포는 미국이 포격해 다 태웠다. 저 두 대만 남았다. 저기 실린 무기와 쌀을 마음대로 가져가라. 재보급은 없다.”

다 달라붙어 배낭·반합, 심지어 양말에도 쌀을 담았다. 전 소위도 양말 목을 서로 묶어 만든 쌀 주머니 3개를 목에 걸치고 탄띠도 걸었다. “일어나면 끙 소리가 날 만큼 무거웠다”고 했다. 6사단 전체가 결의도 다졌다. 철모에 붉은 글씨로 결사(決死)라 쓰고 머리띠도 만들었다.

전사할지 모를 559 고지로 오르기 전 당시 임시 대대장이었던 진명섭 대위가 장교들을 불러모았다. “이제 다 죽게 됐다. 깨끗이 죽자. 그렇다고 목욕하겠다고 할 수도 없다. 주머니에 담배 가루 하나 없게 하자”고 했다. 다들 지갑, 수첩, 가족사진, 신분증을 빼내 모아 불을 질렀다. 봉두난발 같은 시커멓고 더러운 얼굴들…. 말없이 눈물만 뚝뚝 흘렸다.

처음 며칠은 조용했다. 참호에서 대기했다. 동쪽으론 미 24사단 정찰 수색대가 나와 있었다. 중대장은 일본계 미군 소위, 부대원은 흥남에서 피란 올 때 뽑은 무등병 한국 청년이었다. 중공군이 홍천강을 도강하는지 감시하던 1대대와 연락을 주고받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이 정찰대가 사라졌다. 국방부 전사 기록에 따르면 바로 옆 서쪽을 맡고 있던 한국군 2사단도 뒤로 물러났다. 2연대의 1, 2, 3대대는 자신도 모르는 새 최전방이 된 것이다. 그래도 5월 17일까진 별 일 없었다. 전 소위는 “중공군은 낮에는 조용히 있다 밤에만 본격적으로 움직였다”고 했다. 그러나 전사 기록엔 5월 16일 오후 인근 북한강 북쪽으로 중공군이 나타났고 5월 17일엔 중대 규모 중공군이 홍천강을 넘어 집결 중인 것을 6사단이 발견해 기습 공격한 것으로 나온다.

◆18일 밤=상황이 급변했다. 어둠이 짙어지자 갑자기 수류탄이 연발로 터졌다. 중공군이 어느새 대대 옆구리로 다가와 던진 것이다. 전 소위 앞에 있던 강 하사가 옆구리를 맞고 쓰러졌다. 전 소위나 다른 대대원은 칼빈·M1을 반자동으로 놓고 미친 듯 쐈다. 수류탄도 온 사방으로 던졌다. 중공군은 그 사이를 뚫고 들어왔다. 너무 어두워 보이진 않았지만 뭔가가 다가왔다 물러났다. 밤새 쏘고 또 쐈다. 후방은 포 사격으로 지원했다.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났을까.

◆19일 새벽 5시쯤=어슴프레 밝아졌다. 중공군은 밝아지면 안 움직였다. 아군 5명이 전사했다. 중공군 사망자 50~60명쯤. 5월의 짙은 녹음에 시야가 가려 더 이상 알 수 없었다. 약 7시간 전투로 전력이 소진됐다. 소총 탄약은 조금만 남았고 대대의 박격포와 기관포 탄환도 다 떨어졌다. 그때 사단 경비행기가 날아와 통신통을 던졌다. 당시 SCR이란 무전기가 있었는데 1㎞가 넘으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통신통이 떨어진 곳으로 가려면 목숨을 걸어야 했다. 통에는 ‘나산으로 철수하라’고 쓴 전문이 들어 있었다. 나산은 2~3㎞쯤 아군쪽으로 떨어진 봉우리. 소대별로 방향을 정해 철수했다. 공식 기록에 따르면 그때가 오후 3시쯤이었다. 2대대가 있는 울업산엔 여전히 총소리, 박격포 소리가 울렸다.

◆19일 밤 10시쯤=나산에서의 1대대의 화력은 거의 바닥이었다. 총과 포는 있어도 탄약은 없었다. 보급 대책도 없었다. 오후 10시쯤 동쪽 미24사단 방향에서부터 중공군이 공격해왔다. 우리 측 반격은 거의 없었다. 몇몇이 남은 탄환으로 쏘고 수류탄을 몇 개 던졌을 뿐 속수무책이었다. 전 소위도 “총알이 있어야 총을 쏘지”라고 했다. 그냥 어둠 속에서 “자리를 지키라”고 소리만 질렀다. 큰 소리는 위치를 노출시키지만 달리 할 게 없었다. 공격은 계속됐다. 중공군은 나산 남쪽 사면에 있던 대대본부와 3중대를 집중 공격했다. 3중대는 후퇴했고 그 과정에서 대대장이 실종될 지경이었다. 다행인 것은 멀리 중공군이 있는 곳으로 포탄이 우박처럼 쏟아진 것이었다. 전 소위는 “그 덕에 중공군의 공격이 전보다 약했을 것”이라고 했다. 대대장은 나중에 찾았다(전사에 따르면 철수명령에 따라 나산 옆의 427 고지로 이동해 있던 2대대도 대대적인 공격을 받았다. 3대대도 마찬가지였다).

◆20일, 역공=중공군의 야간 공격을 버텨낸 나산의 1대대로 ‘353고지에 중공군에 포위된 3대대의 철수를 도운 뒤 철수하라’는 명령이 왔다. 사실 총알·포탄·식량이 없어 나산에 있는 게 무의미했다. 중간에 보급을 받고 중공군을 공격했다. 두 시간 만에 뚫렸다. 그리고 다 2연대 본부가 있는 427고지로 이동했다.

전 소위의 1대대를 비롯한 2연대 전체가 중공군에 시달리고 있던 20일 새벽, 결과적으로 6·25의 흐름을 바꾼 대반격이 시작됐다. 미8군사령관은 중서부 전선의 미1군단과 9군단에 문산-포천-춘천 방어선으로부터 반격을 명령했다. 한국군 6사단도 20일 오전 5시 용문산 일대에 배치된 7, 19 연대에 공격 명령을 내렸다. 2연대의 3개 대대가 필사적으로 방어하던 장소를 주저항선으로 판단, 그곳으로 전력을 집중했던 중공군은 기습을 받은 것이었다. 21일 새벽 퇴각하기 시작했다. 6사단은 추격했다.
그 사이 2연대는 밥도 먹으며 쉬었다. “노무자들이 밥을 고지로 날라왔다. 3일치가 한꺼번에 왔는데 첫날 만든 것은 이미 쉬어 버렸다. 건빵도 왔고. 밥부터 먹을지 건빵부터 먹을지 헷갈렸다. 총이 몽둥이만도 못했는데 총알이 생기니 얼마나 좋은지….” 3일 9끼를 굶은 이들은 봉두난발에 꾀죄죄한 얼굴이지만 밥·건빵을 먹으며 꿀맛 같은 휴식을 취했다.

하루 뒤 2연대는 추격전에 합류했다. 전 소위는 “중공군이 급히 달아나느라 나무가 빽빽했던 산에 20m 넓이 즉석 흙길이 생겼다. 화천 발전소 맞은편에선 미군 탱크가 죽어 있는 200여 구의 중공군과 말을 깔아 뭉개며 진격할 정도”라고 했다. 중공군은 노무자에게도 잡혀왔다. 그렇게 6사단에 잡힌 포로가 전 소위에 따르면 2617명이다. 화천 저수지에도 많이 수장됐다. 전쟁기념관엔 용문산 전투에서 사살된 중공군이 4944명으로 나온다. 한국군은 전사 26명, 부상 294명, 실종 74명으로 기록돼 있다.

김 대기자=용문산 승리로 6·25의 방향이 달라졌지 않습니까. 중공군의 공세가 둔화됐지요.
전 소위=졌다면 여주와 이천이 넘어가고 서울의 후방이 중공군에 들어갔을 겁니다. 미군은 그냥 휴전하고 나갔겠지요.

김 대기자=2연대 전면 배치가 주효했는데 일부러 그런 건가요.
전 소위=2연대를 전진 배치한 뒤 사단장이 장교들을 불렀어요. 그러면서 ‘제발 이해하라. 그렇게 배치한 데는 세 가지 목적이 있다. 첫째 중공군을 분산시키고, 둘째 적의 전진을 지연시키고, 셋째 반격 시 교두보를 만든다.’ 그러면서 ‘남쪽 용문산(사단 본부가 있는 곳)을 보지 말고 북쪽을 보라’고 했어요. 그게 맞아떨어졌지요.”



전제현 1929년 평북 정주 출생. 충북 봉양에서 교사를 하다 피란 중 자원 입대했다. 이등병에서 출발, 장교 교육을 받고 소대장이 된 뒤 6·25 뒤 군에 남아 28사단 포병사령관, 6군단 포병사령관, 11사단장, 3사관학교 교장 등을 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나보다 먼저 장교 된 선배는 다 나가라’고 해 84년 전역했다 했다. 전역 뒤 15년간 서울시에 있는 오산고등학교 교장을 했다. 그는 정주의 오산중학교 출신이다. 현재는 사단법인 자유수호 국민운동 상임의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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