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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때 처음 본 판자촌 아이들, 그날 이후 난 그들의 포로”

중앙선데이 2011.05.22 01:13 219호 7면 지면보기
가난에 맞서 40년째 싸우는 투사가 있다. 명문대학 졸업 후 빈민촌에 들어가 탁아소와 유치원을 만들고 야학과 봉사로 빈곤 아동의 가난 탈출을 도왔다. 어둠 속의 소외된 사람들에게 희망의 빛을 나누려 했다. “밖은 희망이다. 나가자”고 속삭였다. 그래서 ‘빈민 아동의 왕엄마’로 불렸다. 한나라당 비례대표 1번 강명순(사진) 의원이다. 그가 20일 국회에서 ‘빈나 2020 총회’를 열었다. 2020년까지 빈곤·결식 아동이 없는 나라를 만들자는 빈곤 퇴치 캠페인이다. ‘가난 구제는 나라도 못한다’는 속담이 있다. 하지만 그는 “가난은 구제될 수 있고 구제돼야 한다”고 외쳤다. 그에게 가난 구제의 방법론을 들었다.

‘빈곤 아동의 40년 왕엄마’ 강명순 한나라 의원의 삶과 꿈

-빈민 활동을 시작한 계기는 뭔가.
“1970년 이화여대 사범대 시청각교육과에 입학했다. 크리스천이어서 기독학생회에 가입했고 방학 때마다 도시 빈민 봉사활동을 갔다. 3학년 말에 도봉구 창동의 판자촌으로 봉사 수련회를 갔는데 충격이 컸다. 화장실은 없고 방 한 칸에 작은 부엌이 딸린 닭장집 촌이었다. 사랑에 굶주린 아이들은 내 손가락마다 한 명씩 매달려 따랐다. 그때 사랑의 포로가 됐다. 당시 아이들 눈매를 평생 잊지 못한다. ‘이런 아이들과 함께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들과 함께 살았나.
“대학 졸업 직후 결혼했고 남편과 사당 3동 산동네로 들어가 신혼 살림을 차렸다. 밤마다 쥐가 나오는데 어찌나 무섭던지…. 남편(정명기)을 기독학생회에서 만났는데 당시 감리교 신학대생이었다. 목회자가 된 남편은 사당동 산동네에서 희망교회를 개척하고, 나는 희망 유치원을 만들었다. 공중 변소에 문짝도 없는 루핑 판자촌에서 500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살았다. 무료 유치원에 아이들이 40명쯤 나왔는데 서울대 기독학생회와 연결해 무료 진료를 하고 야간 학교를 운영했다. 판자촌은 79년 모두 철거됐다.”

-어디로 갔나.
“부평 공단지역에서 광야 선교원을 만들었다. 이후 주로 ‘곡소리 나는 동네’로 이사 다니며 같은 일을 했다. 아이들을 모아 교육시키고, ‘부녀 교실’을 열어 직업교육하고 매 주말 무료 진료를 주선했다. 부평의 공단지역인 산곡동·역곡·능곡·독박골, 안산의 원곡동으로 옮겨 다녔다.”

-얼마나 많은 어린이와 함께했나.
“헤아려 보지 않았지만 ‘부스러기 선교회’에서 만난 아이들이 8만 명이다. 빈곤의 현장은 끔찍하다. 끼니를 거르고, 두들겨 맞고, 성폭행당하지만 주눅이 든 아이들은 하소연조차 못한다. 피가 밴 손을 잡아 주면 몸이 굳어 버리는 아이가 있었다. 귀엽다고 머리를 쓰다듬으면 눈물만 뚝뚝 흘렸다. 아버지가 너무 때려 겁에 질리고 긴장해서 그런 것이었다. 이런 기막힌 현장을 떠나는 것은 외도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과로한 남편이 86년 간염에 걸려 치료차 영국에 갔다. 남편이 하던 일을 내가 다 맡았는데 돈이 문제였다. 후원 모금을 위해 ‘부스러기 선교회’를 만들었다.”

-이름이 왜 부스러기인가.
“많이 달라면 외면하니 부스러기 사랑을 달라고 졸랐다. 85년 자살자가 8700명이었는데 생계 곤란 자살자가 1038명이었다. 주로 이화여대 동창생들을 찾아가 ‘부스러기 사랑으로 사람을 살릴 수 있다’면서 지갑을 털었다.”

-일을 계속한 원동력이 뭔가.
“아이들의 웃음과 눈망울이다. 아이들에겐 내가 희망이었는지 모르지만 내겐 아이들이 희망을 줬다. 나머지는 기도하면서 신앙의 힘으로 극복했다. 처음엔 막연하게 빈곤 아동들에게 가족을 만들어주고, 강점을 칭찬하면 빈곤 탈출을 도울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신앙인으로서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40년이나 계속할 줄 알았다면 시작하지 못했을 거다.”

-대학입학 전엔 꿈이 뭐였나.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고교생 때 안창호 선생을 존경했다. 사람의 생각이 바뀌어야 나라가 잘사는 데 교육으로 생각을 바꿀 수 있다는 게 그분의 말씀이다. 초등교육이 잘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탁아사업을 해보니 가난을 탈출하려는 의지가 초등학교 이전에 길러지는 것 같더라. 아이들이 아주 어렸을 때 잘 먹이고 북돋워 주면 어려움에 견뎌내는 힘이 점점 커진다.”

-어려운 점은 없었나.
“빈민운동 한다는 게 원래 어렵다. 가정이 해체된 아이들이 마음을 못 잡고 방황하는 것을 지켜보려면 정말 힘들다. 나도 비닐하우스나 판잣집에서 살며 애를 키웠다. 벽이 얇으니 너무 춥거나 너무 더워 힘들었다. 그러다 빈곤정책을 만들겠다고 국회의원이 됐는데 주변에서 ‘노욕이다’ ‘변절했다’고 돌을 던졌다. 빈민운동 때보다 그런 비난을 견디는 게 더 힘들었다. 또 빈곤 정책을 만드는 것도 빈민운동만큼이나 힘들다.”

-빈곤정책을 만드는 게 왜 힘든가.
“아동복지 예산은 현재 복지부 예산의 0.5%에 불과하다. 아이들이 투표권이 없어 신경 쓰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빈곤아동 문제에 집중해 문제를 풀고 싶은데 정치권 논의란 게 모두 표로 연결시킬 궁리다.”

-무상 복지에 대해선 어떤 생각을 하고 있나.
“무상 시리즈가 보편적 복지가 아니다. 무상 급식한다고 예산 다 집어 넣으면 아침·저녁 굶는 애들이나 성폭행당하는 애들에게 쓸 예산은 어디서 구하나. 그렇다고 한나라당이 대안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내가 속기록을 분석해 보니 입만 열면 서민 얘기하는 민주당이 예결위 때 관련 질의가 겨우 5.3%더라. 한나라당도 크게 높지 않다. 문제를 풀고 싶은데 모두가 표만 생각하니 풀이가 쉽지 않다.”

-빈곤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나.
“물론이다. 빈곤 문제는 자선으론 해결되지 않는다. 그냥 나눠주면 모두 거지가 될 뿐이다. 두 방향에서 접근해야 한다. 빈곤을 둘러싼 생태계를 바꾸려면 가난한 사람이 스스로 빈곤과 싸워 이길 힘을 길러야 한다. 가진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 빈곤과 싸울 수 있도록 힘을 키워 줘야 한다. 서로 나눠야 한다. 모두 하나님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땅에서 잠깐 갖고 있다가 내려놓고 빈손으로 가는 것인데 먼지에 연연할 필요 없지 않나.”

-다시 대학생 시절로 돌아가도 똑같은 길을 걸을까.
“가난한 아이들과 눈을 마주치고, 끌어안고, 깔깔 웃으며 더불어 살았는데 내게도 보약이었다. 그들이 행복한 것을 보면서 내가 행복했다. 딸이 둘, 사위가 둘이다. 막내 사위를 빼면 가족이 모두 사회복지사다. 빈민촌에 사는 게 내 아이들이 성장하는 데 좋은 환경이 아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내 아이들은 부모의 생활을 자연스레 보고 배워 모두 사회복지사가 됐다. 혼자 잘사는 욕심을 내려 놓았으니 행복할 것이라고 믿는다. 행복이란 유산을 물려줬으니 아쉬움이 없다. 삶은 나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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