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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de Shot] 병산서원에서 만난 우리시대의 명인들

중앙선데이 2011.05.22 00:42 219호 18면 지면보기
“바람아 부지마라 휘여진 정자나무잎이 다 떨어진다. 세월아 가지마라 옥빈홍안(玉
紅顔)이 공노매라.” 노가객의 유장한 시조가 마루를 울린다. 대금과 피리·장구가 끊어질 듯 이어지며 소리를 거든다. 노랫말과 달리 강바람은 늙은 악사들의 서리 앉은 머리칼을 날린다. 죽죽 내지르는 남창시조와 간장을 녹이는 대나무 악기들, 두둥 장단을 맞추는 장구의 소리를 마루 한편에 놓인 최신 장비가 낱낱이 잡아낸다. 음색을 따스하게 만드는 진공관 마이크를 통과한 소리는 수퍼오디오 CD(SACD)를 제작하는 고성능 녹음기에 디지털 신호로 기록된다. 그러나 고색창연한 누각에 자연의 소리가 없을 수 없다. 처마 아래서 지저귀는 참새들, 대나무 숲에 고요히 내리는 봄비, 먹구름 속에서 으르릉거리는 천둥 소리도 실황연주 녹음에 한 자리를 차지한다. 20일 안동 낙동강변의 병산서원에서 열린 ‘2011 가락(家樂)-한옥에서 여는 음악잔치’ 풍경이다.

(재)아름지기(www.arumjigi.org)는 우리 문화유산의 보존과 현대적 활용방안을 찾는 활동을 하고 있다. 올해는 국악전문 음반사 ‘악당(樂黨)이반’과 전국의 이름난 한옥 다섯 곳을 방문해 우리 음악을 듣는 ‘오색창연’ 일정을 마련했다. 병산서원 연주회는 지난 14일 서울 북촌 은덕문화원에서 열린 거문고 산조에 이은 두 번째 행사다. 2010년 가락의 마지막 프로그램으로 기획되었던 경북 양동마을 관가정에서의 가곡 공연은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얼마 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양동마을에서 연주한 한국 전통음악이 곧이어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으로 이름을 올려 행사를 기획한 아름지기는 큰 보람을 느꼈다.

악당이반의 김영일 대표는 실력 있는 사진가였다. 1994년 젊은 국악인들 사진을 찍어 주다 우리 소리에 충격을 받고 인생행로를 결정적으로 바꾸었다. 현재까지 국악음반 51장을 제작했다. 41번째부터는 SACD로 만든다. 그는 국악이란 ‘국민이 안 듣는 음악’이라고 정의한다.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음반이 안 팔린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안다. CD는 타이틀당 1000장을 제작하는데 산조는 연 스무 장, 판소리는 열 장쯤 팔리면 끝이다. 열정이 없다면 할 수 없는 일이다. 1년에 1억만 까먹자고 마음먹고 시작했는데 부담이 점점 커진단다. 하지만 국악음반 제작은 죽을 때까지 하겠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병산서원 녹음연주에 나선 이들은 당대의 명인들이다. 시조창의 김호성, 피리 정재국, 대금 조창훈은 모두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원로들이다. 장단을 맡은 김정수 선생도 고수다. 고희에 이른 이들이 한자리에서 연주하는 모습을 다시 보기는 힘들지도 모른다. 그래서 김영일 대표는 ‘마음이 짠하다’고 했다. 한국 건축의 백미라는 병산서원의 만대루에 오른 선생들도 감회가 깊었던 모양이다. 조창훈·정재국 선생은 연주회 중간에 프로그램에 없던 대금과 피리 독주를 청중에게 선사해 뜨거운 갈채를 받았다.

큰 사진은 정재국 선생이 피리 연주를 마치고 인사하는 모습. 작은 사진은 왼쪽부터 조창훈·정재국·김호성·김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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