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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축적 언어와 상징적 몸짓,새로운 공연미학의 답을 찾다

중앙선데이 2011.05.21 13:25 219호 5면 지면보기
그것은 사랑일 수도 있고 욕망일 수도 있다. 원죄일 수도 있고 희망일 수도 있다. 벗어나고 싶은 굴레지만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전 재산과도 같은, 출구 없는 감옥. 그것은 누구나 짐 지고 살아가는, 인간의 실존 그 자체다. 극단 물결의 연극 ‘밑바닥에서’는 세종대 송현옥 교수가 연출한 실존의 큐비즘이다. 러시아 사회주의 리얼리즘 문학을 대표하는 막심 고리키의 고전을 모던하게 재해석한 이 작품이 러시아의 초청을 받아 화제다. 고리키의 고향인 니주니고르도브의 ‘고리키 극장’(6월 10일)과 모스크바 국립 드라마 예술극장인 ‘예르몰로바 극장’(6월 12일)의 85주년 기념 무대에 오른다. 외국 극단이 각색한 작품이 본토의 국립 극장에 역수출된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지난해 카자흐스탄의 국립극장과 고려극장 공연 당시 “연극에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던 이 작품이 특별한 이유는 뭘까.

러시아 가는 연극 ‘밑바닥에서’, 6월 5일까지 대학로 원더스페이스 네모극장

무대장치는 사람 수만큼의 상자와 쇠사슬, 통로가 되는 계단과 사다리뿐이다. 미니멀하게 꾸며진 무대 자체가 웅변하듯, 이것은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 계급 문제 같은 원작의 리얼리즘적 요소를 걷어내고 실존적 상징주의로 풀어낸 ‘고리키의 체호프화이자 베케트화’다. ‘보편적 인간의 모습’을 체화하기 위해 상반신을 노출한 남자 배우들은 서로 비슷해 보인다. 원작의 캐릭터를 희석한 채 인간들이 쓰고 있는 껍데기는 부질없고 결국 모두가 같은 고민을 하고 있음을 변증하는 의미다.

실존적 해석을 위한 상징적 장치는 연극과 무용의 결합으로 극대화됐다. 드라마를 현대무용적 신체의 움직임으로 풀어내는 송현옥 연출의 ‘신체 움직임을 극대화한 역동적 연극언어’는 연극의 새로운 양식미로 인정받으며 본토인들의 호응을 이끌어낸 요인이다. 뮤지컬에서 감정이 확장될 때 노래가 나오듯, 이 실험에서 언어의 감정은 움직임을 통해 증폭된다. 분노와 증오, 고통과 공포, 희망과 환상 등 내면의 심리를 무용이라는 추상적 미의 형태로 표현함으로써 드라마를 추상의 반열로 끌어올렸다.

조형미의 구현으로 공연 예술의 미학적 완성도를 추구하는 송 교수의 스타일은 국내 추상조각의 선구자인 부친 고 송영수 서울대 교수의 영향이 크다. “아버지와의 동료의식이랄까, 저는 조형미 있는 미장센을 좋아합니다. 아버지 작품에는 새를 모티브로 한 것이 많은데, 가고자 하지만 도달하지 못하는 이카루스적 이미지를 갖고 있어요. 인간도 새처럼 날고 싶지만 땅에서 오래 떨어져 있지 못하는, 추락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그런 움직임을 연극언어로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무용으로 추상화된 움직임은 “인간 그 자체가 진실이다” 같은 절제된 함축적 대사와 함께 반추상 상징주의 드라마를 빚어냈다. 창녀, 알코올중독 배우, 도둑의 아들, 망한 사업가 등 어두운 지하 공동주택에 모여 사는 밑바닥 인생들. 1902년 발표된 원작의 암울했던 러시아 밑바닥 주인공들은 2011년의 우리와 다르지 않다. 비단 소외된 계층의 문제가 아닌, 동시대 현대인들이 겪는 보편적 실존 상황을 투영했기 때문이다.

희망을 잃은 사람들은 감옥의 창살 틀 같은 무거운 상자를 자기 구역으로 삼아 부대낀다. 벗어나고 싶은 굴레이나 벗어나서는 살아갈 수 없는 모순을 끌어안고 신음하는 인간군상들. 마법사인 양 어디선가 불쑥 나타난 순례자는 이들에게 희망을 던져주고 이들은 찰나의 위안을 얻지만, 결국 희망은 현실이 아니라 환상이자 거짓이며 절망만이 진실임을 깨닫는다.

“나 이제 어디로 가면 돼? 저기? 여기? 저기?” 현실은 그저 어디로도 향해 갈 수 없는 밑바닥일 뿐. 순례자는 ‘모든 것이 아름답고 좋은 진실의 나라는 없다는 진실’을 견딜 수 없어 목을 맨 청년의 이야기를 꺼낸다. 진실은 좋지만 그것이 언제나 사람들의 영혼을 치유해 주지는 않는다는, 진실에 대한 부인이다. 절망이라는 진실보다 비록 거짓일지언정, 환상일지언정 희망을 보겠다는 의지다. 인간의 실존이야 말로 불편한 진실이지만 그것이 벗어날 수 없는 굴레라면, 거짓에게라도 위로받아야 할 것이다.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결국 진실이 아니라 서로를 다독여 줄 수 있는 환상이 아닐지.

함축적 언어와 상징적 몸짓의 결합으로 한 폭의 추상화를 그려내는 80분간의 환상 같은 무대는 원작을 모르는 관객에게 분명 불친절하다. 그러나 쉽지 않기에 다시 보고 싶어지는 것이 추상의 매력인 것 또한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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