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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명복의 세상읽기] 굿바이 DSK

중앙일보 2011.05.18 00:19 종합 33면 지면보기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같은 범죄라도 누구 소행이냐에 따라 뉴스가 되기도 하고, 묻히기도 한다. 모든 범죄가 뉴스거리가 되는 것도 아니다. 저명성(celebrity)과 희소성(rarity)은 뉴스가치 판단의 중요한 기준이다. 호텔에 투숙한 62세 남성이 객실 청소를 하는 32세 여성을 강간하려다 미수에 그쳤다. 위기를 모면한 청소부는 경찰에 신고했고, 남자는 체포됐다. 보통 사람 같으면 조용히 넘어갔을 수도 있다.



 도미니크 스트로스칸 국제통화기금(IMF) 총재의 룸메이드 성폭행 사건으로 세계가 벌집 쑤신 듯 시끄럽다. ‘DSK’로 더 잘 알려진 그는 세계 경제와 통화·금융 질서의 안정을 책임지는 국제기구의 수장이다. 프랑스의 가장 유력한 차기 대권 주자이기도 하다. 내년 봄 실시될 프랑스 대선에 DSK가 사회당 후보로 출마하면 어떤 대결 구도에서도 압승한다는 게 여론조사의 일치된 예측이다.









[일러스트=강일구]



 충격과 경악 속에 온갖 추측이 무성하다. 순간적 욕정을 스스로 제어하지 못하는 성적 도착 증세 때문이라는 소문과 함께 감춰졌던 그의 화려한 여성 편력이 경쟁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그 정도 지위에 있는 사람이 그런 ‘바보짓’을 했다는 건 상식적으로 믿기 어렵다는 의문과 함께 음모론도 제기되고 있다. DSK의 추락을 바라는 쪽에서 그의 왕성한 리비도(Libido)를 악용해 파놓은 함정에 꼼짝없이 걸려든 결과일 수 있다는 것이다. 약속 시간에 맞춰 방에 투입된 룸메이드를 ‘청소부 복장을 한 일회용 섹스 파트너’로 착각한 게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지만 추측일 뿐이다.



 DSK는 무죄를 주장하고 있다. 유명 언론인인 그의 부인은 “한순간도 남편의 무죄를 의심하지 않는다”며 자제와 예의를 호소하고 있다. 3년 전 남편과 부하 여직원의 불륜이 문제됐을 때도 그는 “어느 부부에게나 ‘하룻밤 불장난’은 있을 수 있는 것” “남편이 매력적인 것도 잘못이냐”고 받아쳤었다. 유죄가 입증되기 전까지는 무죄로 추정하는 것이 물론 옳다. 일단은 재판 결과를 지켜볼 일이다.



 그러나 DSK는 이미 치명상을 입었다. 이륙 직전 비행기 안에서 긴급체포돼 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되고, 등 뒤로 수갑이 채워져 이송되는 순간, 그의 도덕적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설사 무죄로 판명되더라도 IMF 총재직을 계속 수행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대권 후보의 꿈도 접어야 할 것 같다. 병이 문제라면 치료를 받아야 하고, 권력과 자아에 도취돼 원하면 누구나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으로 착각했다면 꿈에서 깨야 한다. “발정한 침팬지 같았다”는 피해 여성의 조롱을 흘려들어선 안 된다.



 DSK 사건은 프랑스 정치권에 몰아친 날벼락이다. 배꼽 아래의 일에 대해 프랑스 유권자들은 비교적 관대한 태도를 취해 왔다. 엄격한 도덕의 잣대를 들이댄다면 전·현직 대통령 누구도 비판에서 자유롭기 어려운 나라가 프랑스다. 그렇지만 이번 경우는 다르다. DSK에 대한 혐의가 사실이라면 이는 엄연한 범죄 행위다.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성범죄자에게 표를 줄 순 없다고 생각하는 유권자들이 많을 것이다.



 DSK는 글로벌 금융위기를 이용해 IMF의 권한과 역량을 대폭 강화했다. IMF의 재원을 2500억 달러에서 7500억 달러로 크게 늘렸다. 미국과 유럽 중심의 지분 구조에도 손을 댔다. 주요 20개국(G20) 서울 정상회의를 계기로 중국·인도·브라질 등 신흥국들의 지분율이 대폭 확대됐다. 유럽에 할당된 이사직 중 두 자리를 신흥국 쪽으로 넘기는 등 의사결정 구조의 개혁도 이뤄냈다. 심각한 재정위기를 겪고 있는 유럽의 그리스·아일랜드·포르투갈에 대한 대대적인 구제금융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그 결과에 유로존의 미래가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럽으로서는 가장 안 좋은 때 DSK 사건이 터졌다. IMF의 구제금융 약속이 제대로 지켜질 수 있을지 그리스가 당장 고민에 빠졌다.



 세계은행과 더불어 IMF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금융·통화 질서의 상징인 ‘브레턴 우즈’ 체제를 떠받치는 양대 기둥 중 하나다. 역대로 유럽 출신이 총재, 미국 출신이 수석부총재를 맡아왔다. DSK의 유고에 따라 존 립스키 수석부총재가 일단 총재대행이 됐지만, 그는 오는 8월 사임할 예정이다. 후임 총재를 새로 뽑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IMF의 지분 구조가 바뀌면 거버넌스에도 변화가 불가피하다. 유럽의 지분율은 30.2%로 줄어드는 대신 신흥국과 개도국의 지분율은 42.3%로 늘어나게 된다. ‘포스트 브레턴 우즈’ 체제에서도 유럽 출신이 총재를 맡는 관행이 계속 유지돼야 하는지 의문이다. 이미 세계경제의 중심은 선진국들 모임인 G7에서 신흥국이 포함된 G20 체제로 넘어갔다. 점점 중요성이 커지고 있는 신흥국과 개도국 출신이 IMF를 끌어가지 못할 이유가 없다. 역사적인 대변혁은 늘 사소한 우연에서 시작됐다. 뉴욕 맨해튼의 소피텔 호텔 2806호실에서 시작된 나비의 날갯짓이 세계경제의 틀을 바꾸는 태풍이 되지 말란 법도 없다.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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