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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1호 재활의가 가수를 찾은 까닭은 …

중앙일보 2011.05.13 01:39 종합 8면 지면보기
명의(名醫)는 영원한 명의였다. 의사들의 로망인 병원장까지 역임하며 의술을 펼치던 이들이 은퇴 후 소외계층을 돌보고 사회의 병리를 고치는 의사(義士)로 변신했다. 따뜻한 마음을 가진 어른들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며 후배 의사들의 본보기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은퇴 후 봉사하는 삶이 너무 행복하다”고 했다.


[J 스페셜 - 금요헬스실버]
은퇴한 명의(名醫)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의료 기부’ 문재호·한만청·김창환·김일순







문재호 연세대 의대 명예교수가 11일 서울 양재동의 직업재활 클리닉에서 환자에게 재활치료를 하고 있다. [김도훈 기자]





문재호 연세대 명예교수는 우리나라 재활의학과 1호 교수다. 연세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미국으로 건너가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재활의학과 전문의를 땄다. 근육이 심하게 퇴화된 근육병 환자 재활치료가 전문이다. 지난해 8월 은퇴한 뒤 더 바빠졌다. 명예교수로 외래환자를 보기도 하지만 근육병 환자들을 위한 ‘직업재활’에 본격적으로 나선 것이다. 문 교수는 “근육병에 걸린 아이들은 치료도 어렵지만 스스로 살아갈 수 있도록 직업훈련을 하는 게 필요한 데 기회가 별로 없다”고 설명했다.



 그는 아이들의 의지를 되살려 주려고 직접 유명인사를 찾아 다녔다. 문 교수의 부탁으로 가수 이문세·노영심씨, 영화음악감독 이병우씨 등이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쳤다. 무용·영어·요리 등도 봉사자들이 나섰다. 그 결과 근육병 환자가 음대에 입학하고 프랑스에서 요리사가 되는 기적도 일궈냈다. 문 교수는 “쪽방에서 혼자 라면을 끓여 먹으며 몸이 굳어가는 아이를 보고 나서 근육병 환자만을 위한 요양소 건립이 남은 인생의 꿈이 됐다”고 말했다. 봉사는 재미있는 놀이와 같고, 봉사할수록 마음과 몸이 건강해진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서울대병원장을 역임한 한만청(77) 명예교수는 암을 이겨낸 의사로 유명하다. 1998년 간암 판정을 받고 투병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2001년 투병기를 담은 『암과 싸우지 말고 친구가 돼라』는 책을 펴내고 강의도 다닌다. 71년 국내 최초로 피부를 절개하지 않고 도관을 혈관에 삽입하는 기법을 도입한 중재적 방사선학의 선구자다. 연구실적이 뛰어나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미국·유럽·일본 방사선의학회 명예회원이 됐다.



 그는 퇴직 후 이공계 활성화 운동에 매달렸다. 2003년부터 ‘국민경제과학만화운동본부’ 이사장을 맡으면서 산학연협동연구소와 함께 과학만화 ‘이공계 짱!’ 시리즈를 펴내고 있다. 우주·인터넷 이야기, 물사랑, 꼬마 과학자 이야기 등 내용을 만들면 전문 만화가가 그림을 그렸다. 지금까지 24권을 발간해 500만 부를 학교나 기관에 무상 기증했다.



 의대 교수의 어색한 ‘이공계 사랑’은 그가 이루지 못한 꿈 때문이었다. 그의 형 만춘(별세)씨는 연세대 이공대학장을 역임했다. 한 교수는 “어릴 때부터 형을 닮은 과학자가 되고 싶었지만 주변에서 직업이 안정적인 의사를 하라고 권유해 의대를 갔다”고 했다.



 한 교수는 장학 기부도 한다. 2002년부터 산학연장학재단 이사장을 맡아 기부금을 모아 매년 20~30명의 중·고생에게 장학금을 준다. 모교인 서울대 의대에는 ‘한만청 연구기금’을 만들었다. 퇴직금을 보태 1억원을 냈다.



 ‘침통을 든 슈바이처’로 불리는 한의사도 있다. 경희대 한방병원장을 지낸 김창환(67) 명예교수다. 30여 년간 매주 토요일 의료봉사를 한다. 시발점은 77년 침통 하나를 들고 처음 찾아간 서울 마포의 난지도였다. 쓰레기를 주워 파는 사람들을 보고 마음이 아렸던 그는 동료 의사 20여 명과 ‘난지도 봉사단’을 만들어 도왔다. 난지도는 사라졌지만 그의 봉사는 계속되고 있다. 토요일마다 성산사회복지관에서 의료 봉사를 하고, 필리핀·베트남·러시아·카자흐스탄 등도 12회 방문했다. 한 번에 3000만원이 드는 비용은 전부 그가 부담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슈바이처 박사를 멘토로 삼았고, 의사가 되기로 결심한 이유”라며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특별한 재능을 받은 만큼 아픈 사람을 더 많이 도와주고 배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연세대 의료원장을 지낸 김일순(74) 명예교수는 퇴직 후 금연 전도사가 됐다. 지난해에는 고령자들이 행복한 노후 생활을 보낼 수 있도록 지원하는 ‘골든에이지포럼’도 창립했다. 김 교수는 “의료인을 필요로 하는 곳이 많아 의사들이야말로 퇴직 후 가장 봉사를 열심히 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며 “퇴직 후에 가장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했다.



글=박유미·배지영 기자

사진=김도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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