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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핏 투자정보도 빼낸 ‘헤지펀드 황소’ 쓰러지다

중앙일보 2011.05.13 00:27 경제 11면 지면보기



갤리언 설립자 라자라트남, 증권 사기 등 14개 혐의 모두 유죄





“어제 골드먼삭스 이사한테 들었는데 3분기 실적이 주당 2달러 적자랍니다. 시장에선 2.5달러 흑자로 예상하고 있는데.”



 11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맨해튼 연방법원에선 녹음테이프가 돌아갔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월가 헤지펀드계의 ‘왕 중 왕’으로 자처한 갤리언 설립자 라지 라자라트남(Raj Rajaratnam·53·사진)이었다. 녹음은 미 검찰이 2008년 10월 하순 그가 거래파트너와 통화하는 내용을 도청한 것이었다. 그의 말대로 골드먼삭스는 며칠 뒤인 10월 24일 사상 처음 주당 2달러 적자를 발표했다. 그에게 정보를 준 골드먼삭스 이사는 라자트 굽타였다. 굽타는 이에 앞서 9월 23일 워런 버핏(Warren Buffett)이 이끄는 버크셔 해서웨이가 골드먼삭스에 50만 달러를 투자할 것이란 정보도 넘겼다.



 녹음테이프를 확인한 배심원단은 라자라트남에게 적용된 9건의 증권 사기와 5건의 사기 공모 혐의를 모두 유죄로 판결했다. 9건의 증권 사기는 모두 내부자정보를 이용한 주식거래로 부당이익을 챙긴 혐의다. 검찰은 라자라트남이 총 6800만 달러의 부당이익을 챙겼다고 기소했다. 5건은 도청을 통해 확인한 사기 공모 혐의다. 공모자엔 굽타 외에도 컨설팅회사 맥킨지 파트너 아닐 쿠마르, 인텔의 임원 라지브 고엘과 갤리언 직원 애덤 스미스 등이 포함됐다. 애초 검찰은 37건의 불법거래를 포착해 수사했으나 증거가 확실한 14건만 기소했고 이날 모두 유죄 판결을 이끌어냈다.









2009년 미 연방수사국(FBI)에 체포된 갤리언의 설립자인 라자라트남의 모습. [뉴욕=AP 연합]



 라자라트남은 스리랑카의 영웅이다. 수도 콜롬보에서 태어나 1981년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경영대학원인 ‘와튼스쿨’에 입학하며 미국으로 건너왔다. 아시안이란 약점 때문에 졸업 후 작은 투자은행에서 사회 첫발을 내디딘 그는 지독한 노력파였다. 미국 반도체산업이 한국·일본 기업에 치이자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던 반도체 업종 한 우물을 팠다. 발로 뛰며 실리콘밸리에 인맥도 쌓았다. 이를 바탕으로 92년 갤리언이란 헤지펀드를 출범시켰다. 마침 90년대 중반부터 미국엔 ‘닷컴’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정보기술(IT) 업계의 인맥을 꿰고 있었던 라자라트남으로선 날개를 단 셈이었다. 90년대만 해도 내부자정보에 대한 규제가 느슨했다. 라자라트남은 그 틈새를 파고들었다. 실리콘밸리 경영자를 통해 빼낸 내부정보에 맛을 들인 그는 점차 대담해졌다. 월가는 그의 족집게 예언에 놀랐다. 투자하겠다는 고객이 몰려 2008년엔 70억 달러 자산을 관리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갤리언의 성장은 되레 검찰의 주목을 끄는 부메랑이 됐다. 2009년 9월 체포된 그는 이날 유죄 판결로 15~20년형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벌금은 별도다. 변호인단은 항소하겠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도청을 통해 확보된 명백한 증거가 있어 판결을 뒤집기는 어려울 전망이다.



 14건의 기소를 모두 유죄로 인정한 배심원단의 판결에 월가는 깜짝 놀랐다. 보통 내부자거래 혐의는 입증이 어렵다. 당사자가 입을 맞추면 입증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헤지펀드는 하루에도 수십 건씩 거래를 한다. 어떤 거래가 내부자정보를 이용한 것인지 꼭 집어내기 어렵다. 그런데도 무더기 유죄 판결을 이끌어낸 건 도청 덕분이었다. 헤지펀드를 겨냥하고 있던 검찰은 2008년 갤리언의 미심쩍은 거래를 포착했다. 이를 토대로 법원을 설득해 영장을 받아낸 뒤 9개월 동안 라자라트남을 비롯한 갤리언 임원과 거래파트너의 통화를 도청했다. 마약사범이나 갱단 수사에나 사용해온 도청을 화이트칼라 범죄에 본격적으로 활용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월가는 움츠러들었다. 검찰의 칼끝이 갤리언으로만 향한 건 아니기 때문이다. 이번 사건을 지휘한 프리트 버라라 연방검사는 지난 18개월 동안 47명을 내부자거래 혐의로 기소했다. 이 중 35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는 월가 헤지펀드 역사상 최단 기간 가장 많은 유죄 판결이다. 헤지펀드 업계는 운용자산을 지난달 사상최고인 2조 달러를 넘기며 승승장구해 왔다.



뉴욕=정경민 특파원



◆라지 라자라트남=1957년 스리랑카에서 태어났다. 영국 서섹스대학에서 엔지니어링을 공부한 뒤 미 와튼비즈니스스쿨에 진학해 경영학석사(MBA)를 받았다. JP모건과 합병하기 전 체이스맨해튼은행에서 금융 경력을 쌓은 뒤 독립해 헤지펀드를 설립했다. 그는 2008년 미국 262위 부자(18억 달러)였다. 스리랑카 출신으론 가장 부유한 사람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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