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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경영] 제 2화 금융은 사람 장사다 (17) 한국투자금융 전무 시절

중앙일보 2011.05.13 00:27 경제 9면 지면보기



원리원칙에 따른 미국식 일처리
이철희·장영자 사건 태풍 빗겨가
“독야청청” 비아냥 들었지만 부실어음 할인 유혹 뿌리쳐



이철희·장영자 어음사기 사건은 금융시장은 물론 정치권까지 뒤흔든 대형 금융사기 사건이었다. 1982년 7월 7일 첫 공판을 마친 장영자씨가 보도진에 둘러싸인 채 법정 밖으로 나오고 있다. 그는 이날 법정에서 검사의 질문에 “경제는 유통”이라고 답해 화제가 됐다.





40여 년 동안 금융계에 몸담고 있으면서 여러 번 자리를 옮겼다. 그중에서도 가장 갈등했던 때가 1982년 2월 장기신용은행 상무에서 자회사인 한국투자금융 전무로 자리를 옮길 때였다.



 1979년 12·12 사태로 집권한 신군부는 사회를 개혁한다며 인사권을 휘둘렀다. 심지어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낸 김정렴씨 사위는 재무부 공무원으로 있다가 갑자기 잘렸다. 당시 재무부 사무관이었던 이한구씨 역시 김용환 장관의 동서라는 이유로 옷을 벗기도 했다. 인사 태풍은 금융권으로까지 몰아칠 기세였다.



 이에 대비해 장기신용은행 김봉은 행장은 3년 임기를 마치고 함태용 전무에게 행장 자리를 넘겼다. 외부의 낙하산을 막기 위해 미리 손을 쓴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신군부의 개입을 피할 수 없었다. 은행뿐 아니라 자회사 사장까지 다 물갈이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장은 자회사인 한국투자금융 사장엔 변공수 부사장이 급히 내부 승진됐다.



 김진형 장은 회장은 내게 한국투자금융 전무를 제안했다. 당시 장은 내에서 내가 서열 둘째였다. 곧 전무로 올라갈 수 있었고 잘하면 행장까지 내다볼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자회사인 한국투자금융 전무로 가라니, 억울했다. 한 달 동안 옥신각신하며 버티다가 결국 인사 명령에 따랐다. 어찌 보면 이때가 내 금융인생의 커다란 전환점이었다. 물론 그 이후의 삶을 돌아보면 좋은 기회가 된 셈이다.



 한국투자금융은 미국의 투자은행을 벤치마킹해 71년 출범한 한국 최초의 단기금융 회사였다. 지금은 단자회사가 뭔지 모르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단자회사는 단기, 즉 1년 미만의 어음 발행, 기업어음 할인·인수·보증 등을 해주는 단기금융 전담 회사다. 한국투자금융이 탄생한 데는 배경이 있다. 60년대 시중의 사채시장은 활황이었다. 기업들은 늘 자금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사채시장 금리에도 거품이 잔뜩 끼어 있었다. 수요가 공급을 앞지르고 있었기 때문에 기업에서 1억원을 구하려면 1억5000만원이 필요하다고 신청해야 하는 구조였다. 한국개발금융은 기업과 자금줄, 양쪽이 신뢰할 수 있는 금융회사가 있어 거래를 주선한다면 자금 공급 문제와 금리 거품이 해결될 거라고 봤다. 그렇게 해서 71년 탄생한 것이 바로 한국투자금융이다.



 한국투자금융 전무로 부임한 지 3개월쯤 지난 82년 5월 금융권을 발칵 뒤집은 사건이 벌어졌다. 이철희·장영자 부부의 어음사기 사건이었다.



 당시 사채시장의 큰손이었던 장영자는 돈이 급한 건설회사들에 접근해 유리한 조건으로 자금을 빌려주고, 대신 그 돈의 몇 배에 이르는 어음을 받았다. 또 그 과정에서 단자회사에 압력을 넣어 거액의 어음을 끊어주게 만들었다. 장씨는 이 어음을 사채시장에서 할인해 무려 7000억원어치의 어음을 유통시켰다. 건국 이후 최대 규모의 금융 사기사건이었다. 연일 일간지 톱기사로 도배됐다. 권력 관련설이 분분했고, 조흥은행장 등 관련자 32명이 구속됐다. 여당인 민주정의당 사무총장이 물러나고 법무부 장관이 두 번이나 교체됐다. 급기야 국무총리까지 물러날 정도로 심각한 후유증과 충격을 던졌다.



 어음사기 사건이 터지면서 많은 단자회사가 하루아침에 어려움에 처하게 됐다. 부실어음에 휘말렸기 때문이다.



 다행히 한국투자금융은 이 사건에 휘말리지 않았다. 나중에 들으니 내가 부임하기 전 한국투자금융도 여러 차례 장씨로부터 거래 제의를 받았지만 이병준 당시 사장이 이를 거절했다. 만약 그때 임직원 중 사심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면 장씨의 제의를 거절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다행히 그런 임직원이 없어 다른 단자회사와 달리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다.



 그동안 단자업계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독야청청한다”고 빈정댔다. 국제금융공사 등 외국인이 20%를 출자한 한국투자금융은 한국에서 영업을 하면서도 미국처럼 원리원칙에 따라 일처리를 하니 국내 시장 사정을 고려하지 않는다고 업계에서 우리를 곱지 않게 봤던 것이다.



 장영자 사건이 마무리되자 정부는 사태수습책을 내놨다. 단자회사를 더 많이 만드는 것으로 기업 자금 조달에 숨통을 틔어주려 했다. 어음사기사건의 발단이 된 것은 사채가 은행보다 돈 빌리기가 쉽고 쓰려는 사람도 많은 금융시장 상황 때문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지방까지 포함한 단자회사가 속속 생겨났다. 7개였던 단자회사는 90년대 초 20여 개로 늘어났다. 하지만 이는 또 다른 부실의 씨앗이 됐다.



윤병철 전 우리금융 회장

 정리=한애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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