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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자 좋아하시는 우리 할머니, 건강하게 오래 사세요”

중앙일보 2011.05.12 03:12 Week& 4면 지면보기
어버이날을 하루 앞둔 지난 7일 오전. 서울 성수동 정유순(93) 할머니의 지하 단칸방에선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지난해부터 결연을 통해 손녀가 된 혜원(한양대부고 2)·지원(동대부속여중 1) 자매네 가족이 방문했기 때문이다.


여고생 혜원이네와 93세 정 할머니의 특별한 인연







지난 7일 서울 성수동의 정유순 할머니 댁을 찾은 혜원(맨 오른쪽)이네 가족이 할머니께 카네이션을 달아드리며 즐거워 하고 있다. 혜원양의 어머니 이이화(맨 왼쪽)씨는 “오랜 만에 ‘다섯 식구’가 다 모여 가족 사진도 찍고 정말 좋다”고 말했다. [최명헌 기자]







할머니 집에 들어서자 후끈한 열기가 가득하다. 한 겨울에도 잘 켜지 않던 보일러지만 혜원이네 가족이 온다고 해서 특별히 아침부터 돌렸단다. 두 자매가 정성스레 준비한 카네이션을 가슴에 달아드리자 “늙은 할매한테 꽃이 다 뭐야”라면서도 할머니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하다. 아이처럼 신이 나 손녀들에게 더 먹일 것이 없나 찾기 바쁘다. 더군다나 이날은 자매와 늘 함께 오는 어머니 이이화(45)씨 외에도 아버지 허남일(45·회사원)씨도 방문했다. 그동안 너덧 번 정도 정 할머니 댁을 방문했다는 허씨는 “사위 대하듯 너무 극진하게 대하시니까 더 자주오고 싶어도 못 온다”고 말했다.



혜원이네와 정 할머니는 지난해 5월 성동노인종합복지관의 ‘한가족 만들기’라는 결연 프로그램을 통해 만났다. 고등학생과 어머니로 구성된 자원봉사팀을 외롭게 혼자 사는 어르신들과 가족으로 맺어주는 프로그램이었다. 정 할머니는 30여년 전 남편과 사별한 후 가사 도우미 등을 하며 혼자 생계를 꾸려 왔다고 한다. 혜원이네는 이제 스스로 식사 챙기기도 버거워하는 정 할머니를 일주일에 한 번씩, 어쩔 땐 몇 번 씩도 만나왔다. 바쁠 때는 전화로라도 안부를 전했다. 할머니를 모시고 외식을 하거나 집으로 초대해 식사를 대접한 적도 여러 번이다. 지난 추석과 설에는 아예 할머니를 아파트로 모셔 며칠씩 함께 지내기도 했다.



할머니의 고향이 같은 강원도라는 점은 서로 더 빨리 마음을 열고 친해지는 계기가 됐다. 강원도 삼척에서 살다가 2008년에 서울로 이사온 혜원이네는 친척들이 모두 그곳에 산다. 어머니 이씨가 “고향에 가보고 싶어하시는데 장시간 차를 타실 수 없어 모시고 가질 못한다”며 “조금만 더 일찍 만났더라면 …”하고 눈물을 흘리자 분위기가 숙연해진다. 그러다 “할머니 만나는 것도 재밌고 이날은 피자도 마음껏 먹을 수 있어 좋다”는 혜원이 말에 온 가족이 금세 웃음보를 터뜨렸다. 정 할머니는 여느 어르신들과 달리 피자와 스파게티도 좋아하신단다. 아버지가 “할머니 보고 싶어서 오는 줄 알았더니 사실은 피자 먹으러 오는 거였구나”라고 놀리자 혜원이 얼굴이 붉어진다.



성동노인종합복지관이 2002년부터 시작한 ‘한 가족 만들기’는 지금까지 총 85명의 할머니·할아버지에게 손자·손녀와 며느리를 갖게 해줬다. 결연한 자원봉사팀은 최소 2년간 활동해야 한다. 현재 혜원이네 같은 결연가족이 43팀이나 된다. 이 프로그램은 2010년 보건복지부의 세대통합프로그램 공모전에서 대상을 차지하기도 했다.



올해부터는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지원을 받아 ‘내 마음의 행복찾기’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진행된다. 복지관의 이유진 사회복지사는 “최근 우울증으로 인한 노인분들의 자살이 늘고 있다”며 “이 프로그램은 할머니·할아버지의 정서 치유에 큰 도움이 되기 때문에 올해부터는 특히 우울증 증세를 겪는 분들을 우선 대상으로 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정 할머니도 혜원이 가족과 만나기 전에는 약간의 우울증 증세가 있었다. “나 같은 늙은이가 더 살아서 뭐해”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셨다고 한다. 하지만 최근에는 달력에 동그라미를 쳐놓고 혜원이네를 기다리는 것이 삶의 즐거움으로 자리 잡았다. 얼마 안 되는 용돈을 모아 혜원이네 식구들에게 양말을 선물하기도 했다. “내가 받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말하는 정 할머니에게는 이 모든 것들이 큰 행복인 셈이다.



혜원이에게 고 3이 되어도 계속 봉사활동을 할 거냐고 물었다. “봉사라뇨? 이미 한 가족인데, 고 3이 된다고 가족이 아닌 게 될 수 있어요?”라는 핀잔이 돌아온다. 할머니댁이 따뜻한 이유가 비단 아침부터 틀어놓은 보일러 때문만은 아니었다.



박성민 행복동행 기자

사진=최명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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