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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청춘은 맨발이다 ⑭ 굴욕의 시간

중앙일보 2011.05.12 00:13 종합 28면 지면보기



나훈아에게 한 “연상 여자와 연애해봐”란 말은
최은희와 키스도 못하자 신 감독이 내게 한 말



신성일의 두 번째 영화 ‘백사부인’(1960)에서 주연한 최은희.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폐기처분. 이보다 1960~61년 내 상황을 더 잘 설명할 수 있는 단어는 없다. 신필름 전속배우로 발탁된 나는 겉으론 멀쩡해 보였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60년 정월 초하루 개봉한 ‘로맨스 빠빠’로 한껏 기대를 받으며 데뷔했으나 연기에 대한 평가는 낙제점이었다.



 그 해 여름 안양 관악산 꼭대기에서 영화 ‘여인(麗人)’ 촬영이 있었다. 포지션이 없는 신인배우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촬영장 스태프로 동원되기도 했다. 폭염이 쏟아지는 날이었다. 30㎏이 넘는 24볼트 자동차 배터리 나무상자를 옮겨야 했다. 당시에는 자동차 배터리를 연결해 카메라를 작동시켰다. 두 손으로 낑낑거리며 관악산 밑에서부터 산꼭대기로 옮겼다. 당연히 내가 가장 늦게 도착했다. 산꼭대기라 그늘도 많지 않았는데, 그것마저 선배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땀이 비오 듯했다. 숨이 턱턱 막혔다. 카메라는 커버에 씌워져 그늘에 놓여 있었다. 너무 힘든 나머지 그 옆에 자동차 배터리 나무상자를 놓고, 엉덩이로 깔고 앉았다. 그 때 등 뒤에서 불벼락이 떨어졌다.



 “야, 임마. 기계 위에 앉지마!”



 최경옥 일급촬영기사가 내 엉덩이를 호되게 걷어찼다. 대스타 최은희의 동생이자 신상옥 감독의 처남으로, 신필름에서 목소리가 가장 큰 사람이었다. 산에 올라온 모든 사람이 그 광경을 지켜봤다. 아프기도 했지만 부끄럽고 억울했다. 평소 배터리 상자를 스스럼 없이 밟고 올라섰던 그들이었다. 치욕적이었다. 내가 인정받은 신인이었다면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선배들의 눈에 난 값어치가 없는 존재였다.



 그 해 신필름의 신작 ‘백사부인’에서 뜻밖의 기회를 얻었다. ‘백사부인’은 중국 고전 괴기담을 각색한 작품으로 뱀으로 둔갑한 중년 미인이 연하의 젊은 남자를 유혹하는 내용이었다. 신 감독은 다음 해 개봉할 ‘성춘향’의 예비작 개념으로 ‘백사부인’을 찍으며 나와 최은희의 호흡을 테스트한 것이 아닌가 싶다. 신 감독이 요구한 키스신 에서 최은희에게 입술을 갖다 대지도 못했다. 하늘 같이 모시는 스승 신 감독의 부인이 아니었던가. 신 감독은 촬영을 중단하고 점심을 먹으며 말했다.



 “성일아, 너 연애 해봤냐? 나이 먹은 여자와 연애해봐.“



 이 말은 내 머리 속에 하나의 계시처럼 꽂혔다. 훗날 내가 여드름투성이의 신인 나훈아에게 “연상의 여자와 연애하라”고 한 것은 빈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도 내 존재를 입증하지 못했다. 61년 신필름의 이형표 감독이 청춘영화 ‘아름다운 수의’를 제작했다. 모든 정황상 당연히 내가 주인공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 주인공은 신필름 소속이 아니라 외부에서 수혈됐다. ‘현해탄은 말이 없다’의 주인공 이상사와 신인 태현실이 남녀 주연으로 발탁됐다.



 모든 게 자명했다. 신성일이란 인간은 신필름에서 쓸모 없는 존재였다. 이 사건을 처음 고백한다. 정말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굴욕과 모멸의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 사건은 분발의 계기가 됐다. 배우 인생을 걸고 승부해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신성일

정리=장상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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