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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네가 바로 주인공이다”

중앙일보 2011.05.10 00:15 종합 29면 지면보기






김법혜
민족통일불교중앙협의회 의장




어느 신선한 새벽, 갠지스 강가의 고요한 숲이었다. 잎이 무성한 나무 아래 고요히 앉아 명상에 잠겼던 한 수행자가 눈을 떴다. 그의 눈은 먼 하늘의 별 하나를 응시했다. 별과 눈 맞춤 하는 순간, 그는 또 하나의 눈을 떴다. 육신의 눈 ‘육안(肉眼)’을 열어 우주의 눈 ‘천안(天眼)’을 뜨고, 우주의 눈을 열어 지혜의 눈 ‘혜안(慧眼)을 뜨고, 지혜의 눈을 열어 진리의 눈 법안(法眼)을 열고, 진리의 눈을 열어 마침내 부처의 눈 ‘불안(佛眼)’을 떴다.



 카필라국의 왕자에서 수행자로 길을 바꾸었던 고타마 싯다르타가 6년 동안 추구해 온 궁극의 목적을 달성하는 순간이었다. 부처의 눈을 뜨는 순간 부처가 된 것이다. 그 눈에 비친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 세상이 바로 ‘부처의 땅’이고 세상 모든 생명이 ‘부처의 씨앗’을 품고 있다는 것이었다.



 부처님이 중생 곁에 오신 것은 인류사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사건이었다. 인간의 모습으로 태어난 부처님이 아니라 법의 모습으로 드러난 부처님은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을 외쳤다. ‘하늘 위, 하늘 아래 오직 존귀한 나’를 외쳤다. ‘나’는 모든 인간, 모든 생명으로서의 ‘나’다. 이보다 간결하고 강력한 인간선언, 인권선언은 없으리라.



 부처님의 가르침은 나의 근본이 부처임을 자각하는 것을 정점으로 삼는다. 그 자각의 삶을 우리는 깨달음의 현전(現前)이라고 한다. 부처님은 연기(緣起)적 질서를 설파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사라짐으로써 저것이 사라진다’는 것이 연기의 구조다. 이것과 저것, 나와 너, 흑과 백 등의 모든 대립하는 관계는 서로 의존하고 있다. 이 상관관계가 4성제와 8정도, 12연기 등으로 설명돼 불교교리의 기본을 이룬다. 여기서 시작된 부처님의 가르침은 경전을 통해 기록됐고 전파되면서 심화돼 왔다. 깨달음을 이룬 직후 하늘사람들을 위해 설했다는 『화엄경』과 초기 부처님의 원음을 담은 『아함경』, 대승불교의 정신을 담은 여러 경전의 정점에 서 있는 『법화경』과 『열반경』에 이르기까지. 이름은 달라도 모든 경전의 핵심은 ‘네가 바로 부처’임을 자각하는 데로 귀착된다. 스스로의 삶에 스스로 주인공이 되라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어떤가? 스스로 주인공의 자리에 서 있는가? 물질에 집착하고 육안의 범위 안에서 행복을 추구한다면 중생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 집착은 고통의 원인이고 고통은 투쟁과 대립의 뿌리다. 집착이라는 틀을 벗어날 때 스스로의 삶에 주인공이 될 수 있다. 연기적 질서를 깨닫는 것이 집착의 근원을 끊는 바탕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나’의 행복을 위해서는 ‘너’의 행복이 필요하다. 내가 행복하므로 네가 행복하고 네가 행복하므로 내가 행복하다. 내가 주인공이 되기 위해서는 너도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 나 혼자 주인공이고 나머지는 모두 조연이라면 평등하지 못하다. 나는 나의 주인공이면서 너의 주인공이고 너는 너의 주인공이면서 나의 주인공일 때 세상은 행복해진다.



 부처님은 “네가 바로 주인공이다”라는 한 말씀을 가르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그 가르침을 위해 출가를 보이셨고 고행을 보이셨고 깨달음과 깨달음의 삶을 직접 보이셨다. 말로 설명하는 진리가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는 진리를 통해 이 세상이 정토이고 일체생명이 불성덩어리임을 가르친 것이다.



 부처님오신날은 육신으로서의 부처님 탄생일이지만, 법신(法身)으로서의 부처님이 오신 뜻을 이해하고 기리며 새로운 삶을 발원하는 날이다. 그런 숭고한 마음으로 밝히는 연등이 온 세상을 비출 때 세상은 더 없이 아름다운 불국토가 될 것이다.



김법혜 민족통일불교중앙협의회 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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