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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호근 칼럼] 한(恨)나라당, 한(閑)나라당

중앙일보 2011.05.10 00:12 종합 31면 지면보기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한 국가의 집권정당 노릇을 제대로 한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지난 정권에서는 ‘국민이 대통령’이라고 치켜세웠고, 현 정권에서는 ‘국민을 섬기겠다’고 몸을 낮췄다. 그런데 대통령은커녕 야단만 실컷 맞았고, 지금은 주인의 한숨 타령을 도통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 하인을 둔 것만 같다. 여당의 운명과 한국정치의 수준이 그런지는 모르겠다. 재·보선 참패가 주인의 속마음인 것을 알아차린 모양인데, 반성한다고 모여 하는 얘기는 꼭 2007년 대선을 앞두고 살길 찾아 헤맸던 탄돌이당이 했던 행색 그대로다. 한나라당 의원들이 탄돌이당의 지리멸렬을 틈타 의원배지를 달았음을 벌써 잊었는지, 한나라당은 국민의 원(怨)을 낳는 ‘한(恨)나라’당이 되고 있다.



 민심을 어떻게 헤아릴지를 논하는 연찬회에서 한(恨)나라당 의원들은 당 내부 세력판도와 총선 생환가능성에 관한 말을 쏟아냈다. 그건 그들의 사정이지 주인에 관한 얘기가 아니었다. 대주주들, 특히 박근혜와 이재오를 투톱으로 세우자고 했고 당권·대권 분리가 흥행에 도움이 안 된다는 정치공학적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단골 메뉴인 청와대 단죄론과 당의 독립가가 울려 퍼졌다. 당청(黨靑)합작도 여의치 않은 판에 자주독립이 최상의 선택일까. 4년 전 민주당이 야당으로 운명을 뒤바꿀 때 밟았던 코스를 잰걸음으로 가고 있음을 알아차린 의원들은 별로 없었다.



 이미 떠나는 민심을 돌아오게 하려면 뼈아픈 반성문도 부족하고, 섬섬옥수 부여잡고 읍소해도 어림없다. 주름진 주인 얼굴에 다시 생기가 돌도록 감동의 결의를 보여야 하고, 피로 쓴 각서를 건네줘야 한다. 가끔 그런 말이 나오긴 했다. 창당정신으로 돌아가자, 우리가 오만했다, 국민에게 감동을 줘야 한다, 어뢰를 맞았으니 천막당사로 돌아가자 등등 약간 비장한 말들이 어른거리기는 했다. 그런데 그뿐이었다. 달라질 기미도 달라질 가능성도 없어 보였다. 4년 전 민주당이 꼭 그랬다. 국민을 위로할 따뜻한 말, 쇄신의 출범을 알리는 신개념의 깃발은 없었다. 정치는 말로 시작하고, 말은 마음에서 나온다. 민심이 떠나도 마음은 차니(寒), 말도 벌거벗고(裸) 행동도 벌거숭이(裸)인 정당, 그래서 한나라(寒裸裸)당이 되었다.



집권정당 연찬회는 교수회의였다. 원로교수들이 참석한 교수회의에서는 말조심을 해야 한다. 원로교수들에게 괘씸죄로 찍히지 않으려면 공손한 말과 온건 논리가 최선이다. 교수회의엔 비판이 난무한다. 스스로 정의롭다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흐뭇하게 자리를 뜰 수 있기 때문이다. 끝없는 진단과 비판, 그러나 실행은 제로인 것이 교수회의의 특권이다. 지도급 의원들의 심기를 안 건드린 채 내부 진단이 난무했고, 서로 정의감을 나눴고, 실천방안을 훗날로 기약했다는 점에서 한나라당 연찬회는 어쩜 그리 교수회의와 닮았을까.



 교수는 말과 글로 사는 직업이다. 세태에 책임질 사람 아무도 없고 그럴 의지도 없다. 정치가는 말과 행동을 업으로 한다. 교수의 말은 대학 울타리 안에서 맴돈다. 정치가의 말은 서민의 힘겨운 생계와 민생현장을 퍼올려야 하고, 행동으로 그 간난의 장벽을 부숴야 한다. 난관을 돌파할 의지, 실천의 엔도르핀이 돌아야 정치가다. 그런데 민생의 한(恨)이 가득 차오르는 나라(恨나라)를 차가운 마음(寒), 맨손 벌거숭이(裸裸)로 어찌 끌고 가려는가?



 연찬회에서 오직 들을 만했던 말은 김태호로부터 나왔다. “당과 정부에 대한 성난 목소리가 하늘을 찔렀다. 당과 정부의 노력이 실제 바닥에선 체감되지 않는다.” 집권정당에 이보다 더 무서운 진단이 어디 있겠는가? 사형선고와 다름없었다. 노풍(盧風)의 진원지에서 김태호는 백의종군했다. 거기서 패하면 정치생명은 끝이라는 절박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바닥을 훑는 끈기와 집념이 노군(盧軍)의 장수 유시민을 물리쳤던 원동력이었다. 김태호로부터 사형 경고를 전달받은 집권정당이 며칠 전 사령탑을 바꿨다. 초선, 비주류, 친박 연합군의 쿠데타가 일어나긴 했는데, 고담준론 그만두고 민생현장에서 죽기를 불사하는 열정, 불통의 체증을 확 뚫어주는 정책선회, 실정(失政)을 갈아엎고 새로 출발하겠다는 각오를 보여주지 못한다면, 아예 당명을 한(閑)나라당(한가로운 정당)으로 바꾸는 것이 좋겠다. 열린우리당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듯, 한국의 미래비전은커녕 제 살길 찾기 바쁜 집권여당은 恨(원한 한, 친이집권계), 寒(찰 한, 얼음공주), 狠(개가 싸울 한, 싸우는 무리), 閒(틈 한, 틈새를 좇는 무리)으로 갈라져 침몰할지 모른다. 집권세력들의 예정된 코스다.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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