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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파이오니어-민족 정체성 찾기 50년 ① 정재훈 전 문화재관리국장

중앙일보 2011.05.10 00:07 종합 22면 지면보기
한 나라의 정체성을 찾으려면 먼저 문화유산을 돌아봐야 한다. 선사부터 역사시대까지 긴 세월의 흔적이 이 땅 곳곳에 새겨져 있다. 문화재청의 전신인 문화재관리국이 생긴 것이 1961년 10월이다.


천마총 발굴하자 박정희 대통령이 아파트 몇채 값을 줬어요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소중한 유산을 정책적으로 지켜온 지 50년. 중앙일보는 문화재청과 함께 그 반백 년을 증언하는 ‘문화유산 파이오니어’를 차례차례 만나본다.











정재훈 교수는 서울 홍제동 산자락 작은 아파트에서 아내와 함께 소박하게 살고 있다. 그는 1년 전 대장암 3기 진단을 받았지만 이겨냈다. 다시 자란 머리칼을 인터뷰 전날 까맣게 염색했다. [강정현 기자]



“1960년대 처음 문화재관리국에 들어갔을 땐 아침 회의에서 일본말이 반이었어요. 우리 윗세대는 일본어로 한국사를 배웠죠. 일제 식민사관을 걷어내야 하는 절체절명의 사명이 있던 시대였습니다.”



 정재훈(73) 한국전통문화학교 석좌교수는 경주사적관리사무소장, 제2대 문화재관리국장 등을 지내며 문화재 현장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대통령을 가장 자주 만난 건 70년대 경주사적관리사무소장 시절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경주종합개발 보고서에 친필로 “신라 고도는 웅대, 찬란, 정교, 활달, 진취, 여유, 우아, 유연의 감이 살아날 수 있도록 재개발할 것”이라는 지시사항을 적었다. 그 뒷장엔 상세한 세부 계획까지 썼다.



 “대통령은 학창 시절부터 경주에 자주 왔다고 합니다. 경주의 사적 분포를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죠. 손수 지도까지 그려가며 개발계획을 세웠어요.”



 73년 경주 계림로 미추왕릉지구에서 황금보검(보물 635호)이 발굴됐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과 불국사 앞 관광호텔에서 오찬을 하며 발굴 소식을 전했다. 대통령은 유물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당시 박일훈 경주박물관장은 자전거 뒤에 유물상자를 싣고 황급히 달려왔다.



 “대통령에게 ‘경주박물관장이 우리나라를 선전하는 사람인데 관용차 하나 배당이 안 돼 자전거에 유물을 싣고 왔습니다’라고 했어요. 그땐 겁 없이 그런 말 잘 했죠. 대통령이 한참 생각하더니 경제수석에게 고급 승용차를 한 대 내주라고 지시하더군요.”



 그러나 경주박물관 운영비가 없어 자동차는 박물관에 세워뒀단다. 지독히 가난한 시절이었다.



 “대통령에게 문화재 발굴하는 데 와서는 지시하지 말라고 했어요. 대신 무덤 파고 뼈다귀 만지는 사람들이니 술이나 돈을 들고 오셔야 한다고 했죠. 그랬더니 천마총 발굴을 하자 발굴단에게 아파트 몇 채 값을 하사했어요. 혁명하는 박정희의 군사적 측면과는 전혀 달랐죠.”



 기관장 대신 사무관급 실무진과 직접 의사소통을 한 것도 박 대통령의 특징이었다.









1970년대 중반 발굴 중인 경주 천마총. [중앙포토]



 “경주개발계획을 세울 때 대통령은 사무관밖에 안 되는 저한테 보고받고 지시했어요. 정보가 새 나가면 투기꾼들 때문에 땅값이 들썩일 것을 염려해서였죠.”



 그렇게 고고학적 발굴로 민족사관을 정립했다. 그러나 당시의 문화재 사업엔 시행착오도 많았다. 지금은 철거된 철근 콘크리트 광화문이 대표적이다.



 “일본 교토의 사천왕사가 가장 먼저 콘크리트로 복원했고, 북한과 중국도 콘크리트 건축이 많죠. 나무도 부족했고, 남들도 그렇게 지으니 대통령도 콘크리트가 더 오래 갈 거라 생각한 거죠. 그런데 콘크리트 안의 철근 구조물이 다 삭아버리는 거예요. 그걸 이번에 나무로 제대로 복원한 건 잘 한 일입니다.”



 박 대통령은 문화유산 전문가를 존중했다. 국무회의가 끝나면 장·차관들은 이선근 당시 문화재위원장에게 주 2회 1시간씩 문화유산 특강을 들어야 했다. 정 교수 역시 단골 강사였다.



 “당시에만 해도 전문가가 별로 없었어요. 안압지를 발굴하고 보니 보고서 쓸 사람이 없었죠. 그래서 내가 ‘안압지의 조경학적 고찰’을 썼어요.”



 그것이 그가 전통 조경 전문가가 된 계기였다. 문화재관리국장이 된 건 86년 전두환 정권 때였다. 그가 국장이 되고 가장 먼저 추진한 것이 5대 궁의 일본식 조경을 없애는 일이었다. 벚나무·플라타너스·회양목 등 일제가 심은 나무를 뽑아버리고 전통 수목인 소나무·단풍 등을 심었다. 창경궁에만 벚나무 4700여 주가 심겨 있었다. 한 나라의 궁궐이 식민지를 거치며 밤 벚꽃놀이 명소로 변해있었던 것이다.



 “박 대통령에게 영향 받은 것도 있겠지만, 벚나무를 베는 건 식민사관을 없애는 일이었어요. 일본처럼 다듬는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키우는 것이 우리 전통 조경입니다.”



 일본식을 제거하는 가장 큰 사건은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였다. 경복궁 권역이 새롭게 복원된 지금은 기억에서도 멀어진 건물이다. 그러나 당시 조선총독부 철거 여부를 두고 거센 논란이 벌어졌다.



 “근대 건축 전공자들이 보기엔 아까운 건물이겠지만, 하필 우리 역사의 콧등에 앉아서 앞뒤를 딱 막았단 말이에요. 문화재관리국장 시절 조선총독부를 철거하고, 경복궁에 주둔하던 30경비단을 몰아내자고 건의했어요. 노태우 대통령 때 결재가 됐지만 김영삼 정권으로 넘어가 실행됐죠.”



 당시 계획에 이미 세종로의 은행나무를 뽑고 육조(六曹) 거리를 정비한다는 안이 들어가 있었다. 그것이 오세훈 시장 때에 실행됐다. 정 교수는 그러나 현재의 광화문 광장은 약간 문제가 있다고 봤다.



 “경복궁을 가려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지금은 동상으로 막아놓았죠. 땡볕에 놔둘 게 아니라 길거리 양쪽으로 약간 긴 회랑 같은 걸 조금씩 두고 커피도 한 잔씩 마시고, 문화상품도 사고, 서울의 역사도 읽게 했으면 해요. 그런 게 육조거리거든요.”



 백제문화정비는 노태우 대통령 공약사업이었다. 백제문화권 개발에 640억 원을 투입했다.



 “640억이 큰 돈이죠. 그때 대통령한테 ‘문화재는 돈만 주고 전문가가 없으면 파괴만 합니다. 전문가와 돈도 주고 좋은 계획도 세워주셔야 합니다’라 건의했어요.”



 그래서 부여·목포·창원·경주에 문화재연구소가 설립됐다. 계획에 따라 익산 미륵사지 앞의 사유지, 웅진성 안의 사유지 등 백제 문화유적 땅은 거의 다 사들였고, 지금도 발굴되고 있다. 그러나 보존과 개발의 가치 때문에 갈등이 끊이지 않는 서울의 몽촌토성이나 풍납토성 등 한성백제 유적을 생각하면 한스럽다고 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추진력은 있는데, 문화에 대한 지혜가 조금만 더 있었으면 좋겠어요. 금강 개발을 할 때 공주에 5000억원만 넣어 백제 왕궁을 복원하면 웅진이 살아나는 건데…. 웅진도독부에 당나라 군대 13만 명이 16년간 주둔해 있었어요. 당나라 도시계획을 하고 있었던 거죠. 그걸 드러내놓으면 중국인도 당 현종이나 측천무후 시대와 연결해 찾아올 테니 지역민이 먹을거리도 생기는 거고요. 세계화를 위해선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먼저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글=이경희 기자

사진=강정현 기자



◆정재훈=1957년 진주사범학교 졸업, 경주사적관리사무소장·해외공보관 지원과장·제2대 문화재관리국장·국립중앙박물관 건립사무국장·문화재보호재단 발굴조사사업단장 등 역임. 한국전통문화학교 석좌교수. 저서로 『한국전통조경』 『소쇄원』 『북한의 문화유산』 등이 있다. 보관문화훈장·홍조근정훈장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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