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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Focus]『어머니의 노래』 펴낸 서울성모병원 옥인영 교수

중앙일보 2011.05.07 02:24 주말섹션 6면 지면보기
#1. 1900년대 초반 중국 허쩌(荷澤)의 대갓집에서 살던 소녀. 아들을 보겠다며 소실을 들인 아버지가 그토록 미웠다. 영재 소릴 들었던 아이는 의사로 자랐다. 병원에서 만난 한국 남자를 사랑했다. 둘은 부부가 됐다. 남편은 내과, 아내는 산부인과로 베이징의 부부 병원을 꾸려 나갔다. 모든 게 행복한 나날이었다.


“모친이 중국인이란 것 부끄러웠죠, 그땐 철없이 … ”

#2. 격동과 혼란의 시절이었다. 1945년 한국이 해방됐다. 여인은 귀국길에 오른 남편을 따랐다. 피붙이 하나 없는 곳에서 그녀는 단지 ‘짱꼴라’로 통했다. 의사 자격도 인정받지 못했다. 화불단행(禍不單行)이었다. 남편이 12세 때 이미 결혼해 애를 낳았고, 일본 유학 때 귀족 가문 여인과 혼인한 충격적 사실을 알게 됐다. 자신도 모친처럼 어느새 소실 신세로 전락한 것이다.



#3. 전쟁과 분단의 후폭풍. 중국은 적성국이 된다. 꿈에 그리던 고향은 ‘갈 수 없는 땅’이 되고 만다. 하지만 용서와 믿음에 기대어 꿋꿋하게 아내·어머니 역할을 묵묵히 감당하는 그녀…. 마치 영화 같은 파란만장 스토리다. 주인공은 고(故) 이상운씨. 서울성모병원 옥인영(65·정형외과) 교수의 어머니다. 옥 교수는 모친의 모진 삶을 더듬어 『어머니의 노래』란 책을 냈다. 그가 사무치는 마음으로 부른 ‘사모곡(思母曲)’을 들어보려 지난 4일 병원을 찾았다.



글=김준술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옥인영 교수가 서울 성모병원 진료실에서 어머니가 생전에 사용하던 주판을 들고 있다.







●‘어버이날’이 가까우니 모친 생각이 더 많이 나시겠다.



 “왜 아니겠나. 살아계실 땐 그 마음을 잘 몰랐다. 바쁘다는 핑계만 대고. 어머니는 2005년 돌아가셨다. 그런데 이듬해 미국 풋볼 선수 하인스 워드가 방한했다. 그의 얘길 듣고 마음이 움찔했다. ‘한국 어머니’를 엄청 내세우는 걸 보고 말이다. ‘우리 어머니는 중국인인데, 그동안 난 어떻게 했나’ 회한이 밀려왔다. 그러곤 중국어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어떤 분이셨나.



 “산둥(山東)의학원을 나왔다. 똑똑해서 중학교 때 월반을 했다. 고교 진로를 고민할 때였다 ‘넌, 차라리 대학에 가는 게 낫다’는 언니의 말을 들었다. 대담하게 언니 명의의 졸업장과 지원서로 시험을 쳤다. 그런데 합격한 것이다. 그렇게 의사가 되어 베이징 병원에서 일하다 거기서 아버지를 만났다.”



●모친이 중국인인 게 싫었나.



 “어머니가 한국어를 잘 못하셨다. 깊은 얘기를 못했다. 당시엔 싫었다. 중·고교 때까진 친구들을 집에 안 데려왔다. 엄마가 중국인이란 걸 알까 봐. 의대 가서 처음 화교 친구를 데려왔는데 엄청 좋아하셨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런 아들도 늘 마음으로 품었다. 화교 교회 가서 공부 잘한다고 자랑도 하고.”



●원래 어머니란 존재가 그런 것 아닌가.



 “맞다. 하지만 어머니는 숨어서 지내다시피 했다. 그땐 사람들이 ‘짱꼴라’ 하면서 중국인을 비하했다. 아들 초등학교 입학식에도 못 오셨다. 아버지는 예민한 성격의 내가 심리적으로 다치지 않도록 일부러 그렇게 한 것 같다. 중국어도 못 배우게 했다.”



●어머니가 고향을 그리워하셨을 텐데.



 “아버지가 ‘해방됐으니 잠깐 고향에 갔다 오자’고 하며 미군 수송선을 타고 군산에 도착했다. 그런데 ‘잠깐’이 38년이 됐다. 나는 2남1녀를 뒀고, 딸도 시집을 보냈다. 그런데 딸이 매일 엄마한테 전화를 하더라. 딸이 어떻게 사는지 내가 다 안다. 우리 모친은 얼마나 고향 땅, 집이 눈에 아른거렸을까. 나는 어머니가 무슨 일을 하려 할 때 못하게 말린 적도 많았다. 중국인이라 여러 걸림돌이 많다는 이유로. 지금 돌이켜 보면 다 마음에 걸린다. 숨어서 살다시피 한 어머니 삶을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 그래서 책을 낸 거다. 또 요즘 다문화가정이 갈수록 많아진다. 그 아이들에게도 용기를 북돋워주고 싶었다.”



●어머니가 엘리트였는데 원망은 안 하셨나.



 “책 읽은 분들이 ‘어머니 삶이 기구하다’고 입을 모은다. 하지만 내 기억으로 어머니는 워낙 강한 성격이었다. 외롭다, 힘들다 이런 얘길 한 번도 안 했다. 아버지가 처음부터 과거를 얘기하지 않았지만, 이해했던 것 같다. 환경이 그렇게 만들었지 부친이 원래부터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믿음이 있었을 것이다. 다 받아들이시는 분, 그게 어머니였다.”









옥 교수의 부친과 모친이 중국 베이징에서 병원을 운영했을 때 간호사들과 함께 찍은 사진(왼쪽 앉은 이가 모친 오른쪽 끝이 부친).







●요즘 같으면 그냥 이혼 사유가 될 텐데. 모친이 남긴 가치가 무엇일까, 희생? 순종?



 “그건 바로 희망이다. 그런 상황에서 희망이 없었다면 어머니가 강하게 살아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모습은 나한테는 큰 유산으로 남겨졌다. 아니 가족이 다 영향을 받았다.”



●그렇다고 늘 당당하지만은 않으셨을 텐데.



 “어머니가 가장 슬픈 모습을 보인 것은 여동생이 세상을 떠났을 때였다. 충격이 컸다. 예고 나와서 서울대 음대에서 피아노를 전공한 여동생은 미국 LA로 유학을 갔다. 어머니는 겨울이면 석 달 정도씩 미국에 가 있곤 했다. 그런데 여동생이 갑자기 급성백혈병에 걸린 것이다. 평소 ‘아들 둘이 있어도 잔정은 딸에 못 미친다’고 하신 어머니였다. 더 가슴 아픈 건 본인의 손으로 사 둔 묘지에 딸을 안장했다는 사실이다. 교회 화교의 장례식에 갔다 장지가 마음에 들어 ‘혹시 내가 겨울에 여기서 죽으면 이곳에 묻으라’고 하신 모친. 그러나 그건 딸의 묘지가 됐다. 내가 중국 유학생들과 얘기해 보면 ‘딸은 어머니의 안 저고리다’ 이런 말이 속담처럼 쓰인다고 한다. 어머니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하는 건 딸이라는 소리다. 그만큼 가슴이 찢어졌을 것이다.”



●옥 교수도 자식 키워보고 나서야 모친 마음을 아셨을 것 같다.



 “자식은 부모의 심정을 알 수 없다. 그건 진리다. 완전히 부모 마음 꿰는 자식이 있을까. ‘내리사랑’이라고 하잖나. 부모는 자식을 위해 모든 걸 주지만, 자식은 그걸 잘 모른다. 나도 어머니가 그렇게 힘들게 살았다는 걸 별로 느끼지 못했다. 지금 애 키워 보니 그 심정을 알게 되는 것이다.”



●때론 아버지들도 쓸쓸한 뒷모습을 보일 때가 있다.



 “부친도 약한 모습이 있었다. 내가 중3 때쯤이었을까. 잠깐 병원 문을 닫은 적이 있었다. 아버지는 신경쇠약으로 우울증 비슷한 걸 앓았다. 사실 책을 낼 때 부담스러웠다. 어머니를 표현하고 싶었는데, 일단 가족이 다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책 집필을 맡은 이유진 작가의 말에 용기를 냈다. ‘그 시대에 어렵게 산 분이 아버지뿐이었겠느냐.’ 아버지를 위로하면서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 못내 아쉽다. 철없던 어린 시절엔 그게 안 됐다.”



●어머니의 영화 같은 삶은 언제 알게 됐나.







중국식 복장을 입고 의자에 앉은 옥 교수의 모친.



 “모친께서 평소 해주신 말씀이 있다. 또 책을 내려고 마음먹었을 때 화교 한 분이 ‘어머니가 생전에 기독교 잡지에 간증문을 많이 쓰셨다’고 하더라. 어머니는 전도사셨다. 그걸 구해 복사한 뒤 모두 번역해 작가에게 줬다. 그렇게 어머니의 삶이 되살아난 것이다. 내가 미처 몰랐던 사실도 많았다. 한국으로 건너올 때 배 안에서 일어난 다급한 사건 같은 게 다 있었다.”



●책은 옥 교수가 직접 쓰진 않았나.



 “어느 인터뷰에서 어머니 얘기가 잠깐 나왔다. 인터뷰한 분이 수필가인데 ‘묻어두기 너무 아깝다’며 출판을 권유했다. 나도 평소 그런 생각이 있었지만 글솜씨가 없으니…. 출판사를 소개 받아 사장님에게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일주일 기다려 이유진 작가(전 한국예술신학대 교수)를 만났는데 이런 얘길 했다. ‘내 삶도 교수님 모친의 궤적과 일치하는 부분이 있다’고 말이다. 알고 보니 군산 출생에 군산여고를 나왔더라. 부모님은 한국 정착 초기 군산에서 병원을 개업했다. 책 내용이 더 절절하고 세밀해졌다. 내가 이 작가에게 구술로 우리 가족 얘기를 들려주고, 자료도 건넸다. 작가는 74세의 고령에도 직접 현장을 발로 뛰며 내용을 보충했다. 일부러 찾으려 해도 만나기 힘든 그런 작가를 만난 게 큰 복이었다.”



●책 내용이 역사 드라마를 연상케 한다. 2차 대전과 제국주의 암운, 조국의 분단, 전쟁과 피란살이, 도전과 인내가 녹아 있다. 그 시절의 거름이 오늘의 열매가 된 것 아닌가.



 “맞다. 부모들의 헌신과 희생이 있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중국은 옥 교수에게 어떤 나라인가.



 “어머니의 나라다. 그러나 내게도 또 하나의 조국이란 감정이 있다. 어머니가 중국 손님을 잘 대접했다. 나도 그렇게 되더라. 아내가 ‘중국에서 왔다고 하면 정신 못 차린다’고 한다. 그렇게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우러나온다. 그게 다 피가 흘러서 그런가 보다.”



●부친이 ‘참기름 주사’로 유명했다던데.



 “직접 개발한 것인데 설사 환자에게 주사하면 신통하게 낫고 그랬다. 참기름을 기본으로 여러 약제를 넣은 것으로 안다. 자세한 성분은 모른다. 어릴 때 집에 깨가 많았던 기억이 난다. 당시엔 정말로 소문난 주사였다는데, 하하.”



●옥 교수는 소아정형외과 전문이다.



 “선천성 기형이나 대퇴골·고관절 등을 두루 치료한다.”



●요즘 학생들 척추뼈가 휘는 측만증도 많다.



 “자세를 바로 해야 한다. 물론 꼭 자세 때문에 측만증을 앓는 건 아니다. 선천적인 이유도 있다. 일찍 치료하면 좋은데. 요즘 애들은 청소년기에 혼자 샤워한다. 부모와 목욕 안 한다. 애들 몸을 자세히 볼 수 없다. 이상을 금방 발견할 수 없다. 어버이날, 어린이날 이럴 때 목욕 같이 가서 때도 밀어 주고 그러면 정도 쌓고, 건강도 살피고 일석이조다, 하하.”



●중년도 허리가 중요한데, 관리는 어떻게.



 “가장 나쁜 게 엎드려서 책 보는 것이다. 허리에 무리를 주니까. 상반신을 구부정하게 굽히고 고스톱 치는 것도 피해야 한다. 친구들에게 이런 얘기를 하면 “허리 쭉 펴면 어떻게 따느냐”고 하는데 건강이 먼저 아닌가.”





j 칵테일  



한국 스쿼시 연맹 만든 주역

권철현 주일 대사와는 ‘복싱’ 동기생




스쿼시의 대부(大父). 옥인영 교수에게 붙는 별칭이다. 운동을 좋아해 대학 때 테니스에 심취했다. 1981년 영국 옥스포드대로 유학을 갔다. 친구들 따라 스쿼시를 쳤다. 재미있었다. 2년 뒤 귀국했는데 한국엔 호텔을 빼면 시설이 드물었다. 잠실 롯데월드에 나가 스쿼시를 연마하며 젊은 코치들과 클럽을 만들고 연맹을 창설했다. 그에게 회장을 맡으라는 제안이 들어왔다. 손사래를 쳤다. “돈 있는 기업인이 해야 된다”고 물러섰다. 건설사 사장이 1대 회장을 지냈지만 외환위기로 기업이 어려워지면서 옥 교수가 회장직을 맡았다. 당시 김운용 대한체육회장이 한마디 건넸다. “체육회 의사는 의무이사 정도인데 옥 교수가 기록을 세웠습니다.”



  98년부터 10년간 회장직을 맡는 동안 그의 진가도 발휘된다. 유학 시절에 정치인 손학규와 친해졌다. “연맹 일을 지원해 달라”고 요청해 쏠쏠히 도움을 받았다. 옥 교수는 스쿼시가 아시안게임 정식 종목에 채택되는 데도 큰 공을 세웠다. 90년대 후반 스쿼시 세계연맹 회장을 만났을 때였다. 여자였다. 명함을 받았는데 뉴질랜드 오클랜드 출신이라고 적혀 있었다. 유학 시절 친했던 오클랜드 정형외과 의사를 거론했다. 회장의 말이 걸작이었다. “제 남편도 의사인데 그와 동창입니다. 부인은 저와 하루 걸러 만나는 절친이고요.” 그 뒤로 연맹 일이 술술 풀렸음은 물론이다. 학생 시절 옥인영 교수의 별명은 ‘옥 가시나’였다. 여린 외모 때문이었다. 그래서 운동을 많이 했다. 스쿼시와 테니스뿐이 아니다. “그 소리가 듣기 싫어 권투를 배웠지요.” 주일 대사인 권철현씨가 경남고 동창이었는데 같이 연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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