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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삐용 의자에 앉아 무소유를 생각해봅니다

중앙일보 2011.05.06 07:52 Week& 2면 지면보기






1 법정 스님이 영화 ‘빠삐용’을 보고 직접 만든 ‘빠삐용 의자’. 스님은 떠났지만 여전히 불일암을 지키고 있다.



깊은 산에는 큰 절이 있다고 했던가. 전남 순천 조계산 자락에는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두 사찰이 시오리 길을 사이에 두고 있다. 조계종의 송광사와 태고종의 선암사다. 굳이 부연 설명이 필요 없는 대가람이다. 조계산은 해발 884m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조계산의 깊이는 헤아리기 어렵다. 그 깊은 골짜기 안에 숱한 사연이 전해 내려온다. 행장 메고 만행 나서는 노승의 마음으로, 조계산 산행에 나섰다.









2 선암사 경내에 있는 왕벚꽃이 활짝 피었다. 선암사는 봄에 홍매화를 시작으로 수양벚꽃·백철쭉 등 갖가지 꽃이 앞다퉈 꽃망울을 터뜨린다.




# 선암사 해우소에 가서 실컷 울어라



선암사 가는 길은 아름답다. 굴참나무·벚나무·사람주나무·정금나무 등 다양한 나무가 어우러져 발길을 가볍게 한다. 2005년 한국의 아름다운 숲길로 지정되기도 했다.



 선암사 가는 길보다 더 예쁜 것이 있다. 봄날의 선암사다. 봄날의 선암사는 수많은 꽃으로 인해 절이라기보다 차라리 예쁘게 꾸민 정원에 가깝다. 4월부터 선암사 경내엔 천연기념물 홍매화를 시작으로 왕벚꽃·수양 벚꽃·백철쭉 등 봄꽃들이 앞다퉈 꽃망울을 터뜨린다. 그렇다고 선암사가 화려하다는 얘기는 아니다. 선암사는 아늑하고 정겹다. 송광사를 노래한 시보다 선암사를 노래한 시가 훨씬 많은 까닭이다.



 선암사에 가면 꼭 가야 할 곳이 있다. 뒷간, 즉 화장실이다. 선암사 해우소는 300년이 넘은 2층 누각 형태의 건축물로, 강원도 영월의 보덕사 해우소와 함께 지방 문화재로 지정된 두 개의 화장실이다. ‘볼일을 보고서 몇 백m는 떨어진 승선교에 가서야 떨어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로 뒷간은 깊고 큼지막하다. 정호승 시인은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선암사 해우소로 가서 실컷 울어라(중략)’라고 노래했고, 소설가 김훈도 『자전거여행』에서 ‘인류가 똥오줌을 처리한 역사 속에서 가장 빛나는 금자탑’이라고 적었다.



 안타까운 소식도 있다. 봄날 선암사의 백미는 사실 꽃보다 차(茶)다. 그러나 올해는 겨울 한파 때문에 찻잎이 많이 얼어 죽어버렸다. 다른 나무는 초록을 되찾았는데 차나무만 초록을 잃고 거무튀튀하다. 올해 선암사 차는 아무래도 맛보기 힘들 것 같다.



● 선암사 가는 길 호남고속도로 승주IC로 나와 10여 분 더 가면 된다. 순천역이나 버스터미널에서 1번 버스(요금 1100원)가 간다. 오전 6시부터 운행하며 소요시간은 약 50분. 선암사 입장료 1500원.









3 16명의 국사를 배출해 승보 사찰로 불리는 송광사의 일주문. 4 불일암 앞 후박나무 밑에는 법정 스님의 유골 일부가 묻혀 있다. 스님이 직접 일군 텃밭도 보인다. 5 부처님 오신날을 앞두고 불일암에 연등이 켜져 있다. 6 불일암 앞에 놓여 있는 법정 스님의 고무신 한 켤레. 꿰맨 뒤꿈치에서 스님의 무소유 정신을 읽을 수 있다.




# 보리밥집을 찾아가는 조계산 트레킹



선암사에서 송광사까지 가는 산길은 힘들다. 굴목재를 넘어야 하는 6.5㎞ 산길인데, 산길이 녹록지 않다. 봄 나들이 나온 마음으로 쉬엄쉬엄 걸었더니 5시간 가까이 걸렸다.



 조계산 산행을 나서면 대부분이 선암사를 들머리로 잡는다. 아마도 볼거리가 많아서일 터다. 선암사를 지나 조금만 더 나아가면 야생화 단지가 나오고 뒤이어 편백나무 숲길이 펼쳐진다. 선암사에서 송광사 넘어가는 숲길을 대표하는 풍경이다. 편백나무 수백 그루가 하늘을 찌들 듯이 서 있다. 편백나무 숲에서는 숨을 깊이 들이마셔야 한다. 편백나무는 다른 나무보다 피톤치드를 많이 내뿜는다.



 편백나무 숲을 지나면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오르막이 제법 가파르다. 숨이 턱밑까지 차올라 한 걸음에 100보 내딛기도 쉽지 않다. 길이 단조로운 것도 산행을 더 힘들게 한다. 이렇게 1시간 반을 꼬박 올라야 선암사 굴목재에 오를 수 있다.



 이 굴목재 아래에, 세상에서 가장 맛있다는 보리밥집이 있다. 세상에 알려져 있는 이름은 조계산 보리밥집. 이 보리밥 한 그릇 먹으려고 이 험한 고개를 올라왔다는 사람도 많다. 주인장 최석두(59)씨가 30년 넘게 운영하고 있는데, 6000원짜리 보리밥을 시키면 우거지 국과 반찬 11가지가 담긴 밥상이 한 상 가득 차려져 나온다. 여기에 동동주(6000원) 한 사발 들이키고 나면 힘들었던 산행의 기억은 싹 가신다. 여기 보리밥이 유난히 맛이 있는 건, 아무래도 여기까지 오르면서 흘렸던 땀 덕분일 것이다. 단 한 명이라도 예약을 받는다. 061-754-3756.



 보리밥집부터는 다시 오르막이다. 하지만 돌밭길이 아니라 흙길이어서 걷기는 편하다. 한 시간 가까이 오르니 송광사 굴목재에 다다른다. 이때부터 내리막이 시작된다. 쪽동백나무·사람주나무·서어나무의 마중을 받으며 홍골에 흐르는 계곡물을 벗삼아 내려오다 보면 어느새 송광사 경내다.



# 법정 스님의 손때가 묻은 곳, 불일암









7 선암사 해우소에서 본 바깥 풍경. 300년이 넘은 이 해우소는 지방문화재다. 8 커다란 무지개 모양의 선암사 승선교는 보물 제400호다.



송광사 매표소를 지나 5분쯤 가면 왼쪽으로 경사진 길이 나온다. 불일암 가는 길이다. 그렇게 가파르지도 않고 그렇다고 평탄하지도 않다. 이 길을 따라 20여 분 올라가면 불일암이다. 원래 법정 스님은 이 길이 아니라 송광사 옆으로 난, 다소 가파른 길로 다녔다고 한다. 현재 그 길은 ‘무소유길’이라 이름 붙여져 있고 길 곳곳에 스님의 어록을 적은 팻말이 있다.



 불일암은 예나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다. 찾는 사람이 거의 없어 적막한 암자일 따름이다. 나무 의자와 스님의 말씀이 적힌 책갈피만이 법정 스님을 떠올리게 할 뿐, 그 흔한 안내문 하나 없다. 산행에 동행한 김은숙 순천관광해설사는 “스님이 입적하신 지난해엔 사람이 많이 찾아왔지만 올해는 손에 꼽을 정도”라고 말했다.



 스님이 앉아 사색에 잠겼다는 의자, 영화 ‘빠삐용’을 보고 직접 이름 붙였다는 그 의자 자리에서 바라보면 조계산 자락이 한눈에 들어온다. 지금은 나무가 시야를 가리고 있지만, 법정 스님이 처음 암자로 들어왔던 30년 전에는 이 깊은 산이 다 내려다보였을 듯하다.



 현재 불일암에는 덕조 스님이 머물고 있다. 법정 스님의 맏상좌로 “10년간 오로지 수행에만 매진하라”는 스님의 유언에 따라 불일암을 지키고 있다. 마침 스님은 출타 중이었지만 운이 좋으면 덕조 스님의 말씀도 들을 수 있다고 한다.



 불일암에 들르면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계단 앞에 있는 후박나무다. 법정 스님이 불일암을 지을 때 이 나무를 심었다. 그리고 지금 나무 밑에는 스님의 유골 일부가 묻혀 있다. 이 또한 스님의 유언에 따라 안내문을 남기지 않았다.



 불일암에서 나와 법정 스님이 다녔던 오솔길을 따라 20여 분 내려가면 송광사가 나온다. 스님은 주로 불일암에서 머물러 송광사에는 지장전을 빼고는 법정 스님의 발자취를 느끼는 게 쉽지 않다. 법정 스님 삼우제를 지장전에서 지냈다.



● 불일암 가는 길 호남고속도로 송광사IC(주암IC)에서 20분 정도 걸린다. 순천 시내에서는 111번 버스(요금 1100원)가 간다. 첫 차는 팔마운동장에서 오전 5시45분에 출발하며 1시간 반 가까이 걸린다. 불일암(송광사) 입장료는 3000원.











글=이석희 기자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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