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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치문의 검은 돌 흰 돌] 가슴 찡했던 이창호의 백의종군

중앙일보 2011.05.06 00:14 종합 32면 지면보기






이창호



지난달 28일 시작된 LG배 통합예선에 낯선(?) 손님이 나타났다. 대국장에 모인 수많은 기사들이(이 대회엔 4개국에서 317명이 참가했다) 자기 자리로 걸어가 조용히 착석하는 이창호 9단의 모습을 지켜봤다. 언제나 ‘시드’였고 초청 기사였던 이창호가 랭킹이 밀리며 생애 최초로 통합예선에 참가한 것이다.



그 앞엔 박영찬 4단이 미소를 흘리며 앉아 있다. 프로 입단 전에 언더그라운드의 고수로 통했던 박영찬은 기쁜 얼굴이다. 이창호는 11세 때 프로가 됐는데 그 무렵 국내 대회 예선전에서 박영찬을 만나 3전3패하며 호된 신고식을 치렀다(그 뒤로 7연승했지만 마지막으로 만난 건 14년 전이다). 그 장면을 생각하며 박영찬은 미소를 지었는지 모른다.



 정적과 침묵 속에서 치러지는 게 바둑대회다. 그러나 예선전은 분위기가 다르다. 신인들의 설렘과 노장들의 느슨함, 외국기사들이 주는 긴장감 등이 어울려 약간은 부산한 느낌마저 준다. 초읽기가 시작될 무렵 여러 개의 자동 초시계가 동시에 소리를 내기 시작하면 본선 대국장과 격이 다른 예선 대국장의 풍경이 속살을 드러낸다.



세계를 떨어 울리던 천하의 대국수 이창호가 그곳에 앉아 연일 분투하는 모습이 가슴을 찡하게 만든다. 29일엔 일본의 오야 고이치 9단, 이달 1일엔 중국의 신예 강자 스웨 4단, 2일엔 중국의 여자기사 리허 3단. 모두 부담 가는 승부였으나 이창호는 역시 이창호였다.



그리하여 드디어 지난 3일 예선 결승에서 홍성지 8단과 마주 앉았다. 홍성지는 하필이면 이창호에게 상대 전적 4승2패로 앞서고 있는 천적. 이창호는 그러나 연전의 피로도 잊은 듯 무서운 기세로 밀어붙여 불계승을 거뒀다. 5연승으로 예선을 통과한 뒤 이창호는 땀을 훔치며 대국장을 떠났다.



대국료 한 푼 없는 예선전(LG배는 패자에게만 대국료를 지급하고 본선 진출자는 없다)을 치르며 그동안의 심경이 어땠는지 물어보지도 않았다.



 하지만 예선전을 치르는 이창호의 자세는 한없이 진지했고 전력을 다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높은 곳이건 낮은 곳이건 언제 어디서나 최선을 다할 뿐인 이창호의 모습이 또 한번 찡한 감동을 줬다.



이창호의 바둑 스타일이 크게 바뀐 것도 감지된다. 그는 격렬하게 전투를 걸어 갔고 변화를 만들어냈으며 유리해도 멈추지 않았다. 이창호가 즐겨 쓰는 ‘誠意(성의)’라는 두 글자가 떠오른다.



얼마 전 무관 탈출에는 실패했지만 이처럼 겸손하게 경기에 성의를 다하는 이창호가 다시 돌아오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40대 명인이 진정한 명인”이란 말이 있다. 이창호 9단은 이제 만 36세다.



박치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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