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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청춘은 맨발이다 ⑧ 힘겨웠던 학창시절

중앙일보 2011.05.04 00:49 종합 22면 지면보기



새벽 구둣발에 맞았던 아픈 기억



출세작 ‘아낌없이 주련다’(1962)에서 엄앵란과 함께 출연한 신성일. 힘겹던 젊은 시절을 단방에 날린 작품이었다.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이 세상은 나 혼자다. 인생은 결국 홀로서기다. 나는 이 같은 철리(哲理)를 고교(경북고) 2학년, 열일곱 나이에 체득했다.



1학기 말 무렵 어느 날 새벽이었다. 몸이 건장한 남자 서너 명이 신발을 신고 방에 들어와 나를 발로 찼다. 마른 하늘에 벼락 같았다.



책방·약방을 하시던 어머니의 계(契)가 깨지는 바람에 집안이 쑥대밭이 됐다. 어머니는 야반도주했고, 집에는 나와 여동생밖에 없었다. 세 살 위인 형은 군 복무 중이었다.



 그 사람들은 어머니의 행방을 물으며 나를 무지막지하게 때렸다. 얼굴에서 시뻘건 코피가 줄줄 흘렀지만, 그들은 상관않고 내 멱살을 잡은 채 경북도청까지 약 1㎞를 끌고 갔다.



그때까지 나는 온실 속의 화초처럼 세상물정 모르던 ‘범생이’였다. 초등학교 6년 성적표가 죄다 ‘갑상’(최고 등급)일 정도였다. 그들은 마치 인민재판을 하듯 이른 아침임에도 경북도청 앞마당에서 어머니의 거처를 물으며 나를 다그쳤다. 어머니가 경북도청 초대 부녀계장이었기에 그 장소를 고른 것 같다.



 아, 그날의 모욕감과 상처란!



‘아, 살아야겠다. 이것만 이겨낼 수 있다면 모든 걸 이겨낼 수 있겠구나’ 하는 강한 의지를 느꼈다. 이 세상은 나 혼자며, 아무도 나를 돌봐줄 사람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끌려가면서 누구를 원망하지 않았다. ‘어머니께서 얼마나 애쓰시다가 이렇게 됐을까’ 하며 되레 연민의 감정이 들었다.



 지금도 엇비슷한 일을 당하는 청소년이 많다. 부모는 있으나, 부모와 함께할 수 없는 뻐꾸기 가족(부모의 이혼·학대·빈곤 등으로 부모와 자녀가 떨어져 살아가는 가족)까지 등장한 판이다.



결국 죽는 것도, 아픈 것도 혼자다. ‘나 홀로’에 대한 의지가 중요했다. 자기관리만 잘하면, 세상 무서울 게 없었다. 좋은 부모 만난 친구들을 부러워할 이유가 없었다.



 1962년 영화 ‘아낌없이 주련다’로 스타덤에 오른 직후 고교 시절 날 때린 사람을 찾아 대구로 내려왔다. 폭행을 가했던 사람 중 한 명이 대구 시내 한 극장 앞에서 세탁소를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간 쌓인 것을 풀고 싶었다. 그 사람에게 ‘어떻게 그런 식으로 어린아이에게 폭력을 행사했느냐’고 묻고 싶었다.



동창생인 이장환에게 미리 그 사람을 살피도록 부탁했다. 그런데 막상 대구역에서 만난 이장환은 “신영(신성일 본명)아, 그 사람 지난해 죽었다”고 하는 게 아닌가. 맥이 탁 풀렸다. 한참 그 자리에 서 있다가 바로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왔다.



 사실, 고교 시절 때의 수모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일단 학업이 엉망이 됐다. 고등학교를 겨우 졸업했지만 더 이상 대구에서 살 수도 없었다. 무작정 상경(上京)을 선택했다. 57년 서울에 온 후에도 대입에서 잇따라 떨어지고, 방황은 계속됐다. 판검사가 되겠다는 꿈이 너무나 멀어 보였다. 서울에 자리 잡은 형님에게 도움 받는 생활도 자존심에 걸렸다.



그래서 당시 서울 빈민이 모여 사는 청계천에서 호떡장사를 시작했다. 웬걸? 파리만 날려 석 달 만에 장사를 접었다. 돈을 벌어 공부하겠다던 꿈도 펴지 못하고, 또다시 서울 거리를 헤매야 했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잊지 않았다. 남한테 빌어먹고 다니는 건 남자로서 치욕이라는 각성(覺醒)이었다.



신성일

정리=장상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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