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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경영] 제 2화 금융은 사람 장사다 ⑬ 외자유치 활동 실패의 교훈

중앙일보 2011.05.04 00:24 경제 11면 지면보기




한국전 영웅 밴플리트 장군에게 부탁
미국 기업인들 대거 방한했지만 …
인프라 없어 돈 못 빌려 … 무조건 구걸은 안 된다 깨달아



한국전쟁 당시 미 8군 사령관이었던 밴플리트 장군(가운데)은 1962년 5월 28명의 미국 경제사절단을 이끌고 한국에 왔다. 사절단은 2주간 머무르면서 울산공업단지를 시찰했고, 제철과 비료공장에 대한 투자를 검토하겠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큰 성과를 거두진 못했다.





1960년대 경제계의 가장 큰 과제는 외자유치였다. 정부가 외자 유치를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을 기울였지만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일하던 한국경제인협회(전국경제인연합회 전신)의 주요 임무도 민간부문의 기간산업 건설과 와자도입이었다. 그런 만큼 경제인협회는 발족과 동시에 외자도입 촉진단을 만들고 기업인들이 조를 짜서 미국·일본·유럽 등을 다니며 투자유치를 시도했다. 당시 우리나라 1인당 국민총생산(GNP)은 1963년에야 100달러에 간신히 턱걸이한 수준이었고, 전쟁복구를 서두르고 있던 그 시절의 경제사회 형편으로는 외국인들의 관심을 끌기 어려웠다.



 고민 끝에 우리는 외국의 투자사절단을 한국으로 모셔오기로 했다. 직접 우리 상황을 보여주며 투자를 이끌어보자는 취지였다.



 먼저 일본 게이단렌(經團連)의 우에무라 고고로 회장을 필두로 한 대표단을 국내로 초청해 울산공업단지가 들어설 부지를 둘러보게 했다. 일행 가운데 기업 회장이 많았는데 그들이 국내에 머무르는 동안 일하는 모습을 보고 몹시 놀랐던 기억이 난다. 그들은 매일 회의를 열어 각자 어디 가서 누구를 만나 무엇을 했는지 보고한 뒤 다음날 계획을 발표하는 등 치밀하고 유기적으로 움직였다. 정말 국가를 대표하는 단체답게 일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활동사항을 처음부터 끝까지 기록으로 남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에 비해 해외에 파견된 우리 대표단은 각자 움직이면서 중구난방으로 일하는 식이었다. 기록도 남은 게 없다. 외자유치단 활동을 해본 적이 없어 그랬겠지만 어쨌든 아쉬움이 컸다.



 미국과도 접촉했다. 미국 경제사절단 초청을 위해 우리가 부탁한 사람은 전쟁영웅으로 불리던 제임스 밴플리트 장군이었다. 밴플리트 장군은 한국전쟁 당시 미8군 사령관으로 참전해 우리나라와도 인연이 깊었다. 아들 역시 B-29 폭격기 조종사로 한국전에 참전했다 전사했다. 협회는 장군에게 기업인들을 모아 방한해 줄 것을 부탁했다. 울산공업단지 조성을 위한 투자를 이끌어내기 위해서였다. 밴플리트 장군이 제철소와 석유회사 같은 거대 기업 사장들로 경제사절단을 꾸려 그들을 이끌고 방한했다. 특히 미국 유명 기업인의 대거 방문은 정부 입장에서도 지대한 관심사가 아닐 수 없었다.



 우리 사무국 직원들은 모두 준비작업에 뛰어들었다. 미국의 대단한 경제인들이 오는 만큼 대접을 잘해야 했다. 나는 수송을 맡았는데, 무엇보다 큰 문제는 그들을 태우고 다닐 차편이었다. 당시 우리 정부 기관은 귀빈 수십 명을 한꺼번에 수송할 만한 좋은 차를 갖고 있지 못했다. 그나마 한국 최고의 부자라 할 수 있는 경제인협회 창립회원 13명이 고급 승용차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차량들을 전부 차출했다. 정부 청사에 이 차들을 전부 다 가져다 놓고, 나중에 산업은행 총재가 된 정춘택 사무관과 함께 차량 점검을 했던 일이 아직도 기억난다.



 미국 경제사절단의 수행문제를 두고 상사와 티격태격했던 일도 떠오른다. 판문점 방문 일정이 있는데, 점심식사를 해결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길이 엉망이라 갔다 오는 데 시간이 빠듯한 데다 중도에 변변한 식당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조선호텔 도시락을 주문해 가져가자”고 하고, 총무부장은 “적당한 식당을 미리 물색하자”고 의견을 냈다. “된다” “안 된다”며 서로 언성을 높이게 됐다. 결국 이를 본 김입삼 사무국장이 “윤군 의견대로 하자”고 정리했다. 총무부장이 이에 깨끗이 승복하는 것을 보고 토론은 하되 결론이 나면 군말 없이 따라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하지만 이러한 외자유치 활동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도로 같은 인프라가 워낙 변변찮은 상황이다 보니 방한한 외국인들로부터 투자를 이끌어내는 데 실패한 것이다. 외자도입도 우리가 준비돼 있어야 되는 것이지 무조건 구걸해서는 성공할 수 없었다.



 경제인협회는 정부의 경제개발 계획을 위해 많은 협조를 했다. 구로공단을 만든 것도 경제인협회였다. 당시엔 먹고살려면 수출을 해야 하는데, 우리나라 수출품이라곤 한천과 생사가 주종이었고 한 해 수출 규모는 오늘날 하루 수출의 50분의 1 정도에 불과했다. 그때 재일교포 분들이 일본사람들이 해서 성공한 수공업 제품, 즉 인형이나 인조 꽃 같은 걸 만들어서 수출하면 되겠다는 아이디어를 내서 만든 게 구로공단이었다. 우리나라가 국가경제 기틀을 만들어가던 시기에 경제인협회에서 일했던 경험은 이후 사회생활에 커다란 밑거름이 됐다.



윤병철 전 우리금융 회장

정리=한애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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