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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영의 시시각각] 세력권 정치의 냉엄함

중앙일보 2011.05.04 00:11 종합 38면 지면보기






김환영
중앙SUNDAY 사회에디터




지미 카터는 미국 제39대 대통령(1977~81)으로 재직할 때 우리나라 제4공화국의 인권상황을 비판했다. 정치범 리스트를 들이밀며 석방을 요구하기도 했다. 북한의 인권 상황에 대해서는 그때나 지금이나 침묵이 기조다. 카터 전 대통령의 이러한 태도는 ‘위선’이라는 도덕적 잣대로 평가할 수도 있으나, 냉엄한 세력권(勢力圈·sphere of influence)의 논리가 작용한 결과이기도 하다. 그가 인권 외교를 표방하며 비판한 나라들은 니카라과·파라과이·칠레와 같이 대부분 미국의 세력권에 포함된 나라들이었다. 이 점에서 상당수 학자는 카터 전 대통령 또한 이상주의자가 아니라 현실주의자였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세력권은 초강대국, 강대국이 다른 나라에 대해 독점적·지배적 통제권을 주장할 때 사용하는 국제정치학 용어다. 동서 냉전기에 소련은 동부 유럽을, 미국은 중남미를 세력권으로 거느리고 있었다. 아시아에서는 한국·일본·호주 같은 나라들이 미국의 세력권에 포함됐다. 미국과 소련은 서로의 세력권을 인정하고 상대방 세력권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간섭하지 않았다.



 세력권은 느슨해지기도 하고 조이기도 한다. 소련·동유럽권의 붕괴로 냉전이 소멸되자 기존 세력권의 운영은 느슨해졌다. 세력권의 국제정치는 상하관계의 정치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등장도 세력권 정치에 얼마간 숨통을 트는 데 일조했다. ‘오바마 독트린’에 따르면 “국제무대에서 손아래(junior) 파트너와 손위(senior) 파트너는 없다.”



 느슨해진 세력권 정치의 최대 수혜자 중 하나는 중남미다. 포르피리오 디아스 전 멕시코 대통령(재임기간:1877~80, 1884~1911)은 “불쌍한 멕시코는 신(神)으로부터는 너무 멀고 미국으로부터는 너무 가깝다”고 한탄한 바 있다. 멕시코뿐 아니라 중남미 국가 모두에 미국은 껄끄러운 ‘북쪽의 거인’이었다. 중남미에서 미국 세력권이 퇴조했기 때문에 민주적인 좌파 정부들이 사회개혁과 경제성장을 이룩했다는 분석도 있다.



 세력권의 측면에서 비교적 안정된 중남미와 달리 세계의 다른 지역들은 지금 혼돈 상황이다. 북아프리카·중동의 민주화 도미노로 이집트와 같은 나라들이 미국의 세력권에서 이탈하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오사마 빈 라덴의 사망으로 중동 세력권 지도의 향방은 더욱 불투명해졌다.



 세력권 다툼은 살아 있다. 그러나 공식적으로는 모든 강대국들이 자신이 세력권의 국제정치를 추구하고 있다는 것을 극구 부인한다. 상대방에 대해서는 세력권을 팽창하려 한다는 의심을 늦추지 않고 있다. 러시아는 미국이 러시아의 전통적인 세력권을 넘본다고 불만을 토로한다. 미국은 러시아가 소련 세력권의 부활을 꿈꾼다고 공격한다.



 세력권 다툼이 다시 격화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그 핵심에는 중국의 부상이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의 4월 발표에 따르면 구매력평가지수(PPP)를 기준으로 한 중국의 실질 경제 규모는 불과 5년 뒤인 2016년에 미국을 추월한다. 미국과 중국이 경제 전쟁, 군비 경쟁, 세력권 다툼, 군사 충돌에 돌입할 가능성이 커졌다. 존 아이켄베리 프린스턴대 교수는 최근 포린어페어스에 발표한 논문인 ‘자유주의 세계 질서의 미래’에서 미국이 주도해 온 자유주의적 국제주의가 세력권 다툼으로 대체될 가능성을 분석했다.



 카터 전 대통령이 북한 인권에 대해 침묵하는 배경에는 북한이 중국의 세력권에 포함된다는 인식이 있다. 반면에 국제사회는 남한을 미국 세력권으로 본다. 한반도는 미국과 중국의 세력권 다툼의 단층선(fault line)이라는 게 냉엄한 현실이다.



 세력권 다툼의 정치에서 우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북한이 우리의 세력권이라는 것을 인정받는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북한인권법’은 반드시 필요하다. 북한이 우리의 세력권이라는 선언적 의미가 있다. 북한에 대한 식량 지원도 인도주의적인 의미가 있을 뿐만 아니라 북한을 우리의 세력권화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조치다.



김환영 중앙SUNDAY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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