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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클립] 중국 도시 이야기 (7) 풍요의 고장 청두(成都)

중앙일보 2011.05.04 00:06 경제 18면 지면보기



이백·두보 노닐던 ‘시인의 도시’ 청두…지금은 맛으로 6조 버는 ‘미식의 도시’





“좋은 비는 시절을 알아, 봄이 되니 내리네. 바람 따라 몰래 밤에 들어와, 소리 없이 촉촉히 만물을 적시네. 들길은 구름이 낮게 깔려 어둡고, 강 위에 뜬 배는 불빛만 비치네. 새벽에 붉게 젖은 곳을 보니, 금관성(錦官城·청두의 다른 이름)에 꽃들이 활짝 피었네.” 시성(詩聖) 두보(杜甫)가 청두(成都)에 머무를 때 지은 시 ‘봄밤에 내리는 기쁜 비(春夜喜雨)’다. 정우성과 가오위안위안(高圓圓)의 애틋한 사랑을 그린 영화 ‘호우시절(好雨時節)’의 무대 쓰촨(四川)성 청두로 떠나보자.



신경진 중국연구소 연구원



한나라 시절 이미 인구 40만 명 ‘전국 6대 도시’



“촉나라 가는 길 어려워라. 푸른 하늘 오르기보다 더 어렵구나(蜀道之難 難於上青天).” 시선(詩仙) 이백(李白)이 지은 ‘촉도난(蜀道難)’의 한 구절이다. 이백의 고향 쓰촨은 천부의 나라(天府之國)로 불린다. 부(府)는 문서나 재물을 저장하는 창고다. 천부(天府)는 천자의 창고다. 천자는 하늘 아래 최고 부자다. 천부지국이 천하에서 가장 좋은 나라인 이유다.









쓰촨성의 중심 도시인 청두시의 별명은 용성(蓉城), 금관성(錦官城)이다. 도시를 상징하는 꽃이 부용화이고 비단으로 유명하기 때문이다. 지난 2009년 건국 60주년 행사를 위해 시민들이 천부광장에 모여 부용화 모양의 등을 만들고 있다. [중앙포토]






1986년 청두시 북쪽으로 38㎞ 떨어진 광한(廣漢)시에서 청동기 유물이 발굴됐다. 삼성퇴(三星堆) 유적이다. 중국 황하문명과 다른 독자적인 고대 청동기 문명의 존재가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중국 북방의 신석기 홍산(紅山)문명과 더불어 중국 고대문명이 단일하지만 않았음이 증명됐다. 삼성퇴 문명을 이룬 고대 촉국은 상(商)왕조와 대등한 세력으로 성장했다. 촉국은 기원전 316년 진(秦)나라 군대의 말발굽에 무릎을 꿇었다. 망국의 귀족들은 남쪽으로 떠났다. 버마와 베트남 북부에 정착한 그들은 삼성퇴 문화를 이어갔다.



한편 진나라 촉군(蜀郡) 태수 이빙(李泳)은 청두 서쪽을 흐르는 민강(岷江)에 도강언(都江堰)을 건설했다. 중국 수리 관개사업의 효시다. 물길을 통제해 홍수를 막자 농업이 발달했다. 비옥한 쓰촨의 물산은 더욱 풍부해졌다. 사마천(司馬遷)은 『사기(史記)』에서 지금의 시안(西安) 일대인 관중(關中)지방을 천부지국이라 불렀다. ‘기름진 들판 천 리(沃野千里), 금성천리(金城千里)’로 불리던 관중은 진한(秦漢) 이후 쓰촨에 천부지국의 타이틀을 넘겨줬다.



청두는 중원의 후방이다. 한나라 시절의 청두는 인구 40만 명으로 전국 6대 도시였다. 왕조가 쇠락하고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제갈량(諸葛亮)은 이곳 익주(益州)를 주목했다. 유비(劉備)를 보좌해 촉한(蜀漢)을 세웠다. 삼국정립의 판도를 만든 그는 중원 통일의 꿈을 여기서 키웠다. 청두시에는 지금도 제갈량을 모시는 사당 무후사(武侯祠)가 있다.



청두는 시인의 도시다. 당(唐)나라의 시선 이백은 청두에서 자랐다. 시성 두보는 현존하는 시 1400여 수 가운데 800여 수를 청두에서 지었다. 그가 3년9개월간 머물던 두보초당(杜甫草堂)은 지금도 많은 관광객이 찾는 명소다. 송(宋)나라의 대문장가 소식(蘇軾)은 청두 남쪽 미산(眉山) 출신이다. 중원의 문화가 예(禮)를 중시하고, 현재의 후베이(湖北)성인 초(楚)의 문화가 무속을 중시한다면, 쓰촨성 청두는 신선(神仙)을 중시했다. 도교의 발상지 격인 청성산(靑城山)이 청두에서 멀지 않다. 불교의 성산 아미산(峨眉山) 인근서 태어난 소식은 도교와 불교를 아울렀다. 청두의 자연과 문화가 소동파의 명문을 만든 것이다.



청두는 이민의 도시다. 명(明)나라에서 청(淸)나라로 넘어가던 시절 장헌충(張獻忠)이 군대를 이끌고 청두에 들어왔다. 황제를 자칭한 그는 국호를 대서(大西), 청두를 서경(西京)으로 정한 뒤 잔혹한 학살을 자행했다. 『명사(明史)』 ‘장헌충전’은 그가 청두의 군인 98만, 남녀 6만만(萬萬)을 죽였다고 기록해 놓았다. 6만만이면 6억 명이다. 당시 쓰촨의 인구가 600만 명을 넘지 않았으므로 이 기록은 과장이 분명하다. 하지만 수많은 백성들이 그에게 죽임을 당한 것은 분명하다. 곧이어 청의 만주족 군대가 몰려 들어왔다. 계속된 전란과 전염병, 기근으로 쓰촨의 인구는 급속히 줄었다. 청나라가 안정되자 이민의 물결이 쓰촨을 뒤덮었다. ‘호광전사천(湖廣塡四川)’이란 말이 있다. 후난(湖南)·후베이·광둥(廣東)·광시(廣西)의 백성들이 쓰촨을 채웠다는 말이다. 기록에 따르면 1685년 9만 명에 불과하던 쓰촨의 인구가 불과 30년 만에 949만 명으로 폭증했다. 새로운 쓰촨, 새로운 청두가 이때부터 시작됐다.









은근히 중독성이 강한 쓰촨 요리인 중국식 샤브샤브 훠궈. 붉은 탕에 각종 고기와 야채를 데쳐먹는 맛이 일품이다.











눈 깜짝할 사이에 얼굴의 가면을 바꿔 쓰는 쓰촨의 전통 기예인 변검 공연 모습.



입안이 얼얼하게 매운 쓰촨 요리, 변화무쌍한 가면극인 변검(變<81C9>)과 쓰촨의 전통극인 천극(川劇) 등 새로운 쓰촨 문화가 이때부터 꽃을 피웠다. 중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4인방이 있다. 루쉰(魯迅·노신), 궈모뤄(郭沫若·곽말약), 바진(巴金·파금), 마오둔(茅盾·모둔)이 그 주인공이다. 그 가운데 궈모뤄와 바진이 쓰촨 사람이다. 바진은 청두 태생이다. 옛말에 ‘천하의 인재는 쓰촨으로 들어간다(天下才人皆入蜀)’라는 말이 있었다면, ‘천하 인재는 모두 쓰촨에서 나온다(天下才人皆出蜀)’라는 말이 생겼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영웅 주더(朱德·주덕)와 덩샤오핑(鄧小平·등소평)의 고향도 쓰촨이었다.



쓰촨의 근현대 역사 역시 평탄치 않았다. 청나라 왕조를 무너뜨린 신해혁명이 벌어지던 당시 쓰촨에서는 기찻길을 서구 열강으로부터 지키자는 보로(保路)운동이 불길처럼 번졌다. 보로운동은 중국 버전의 의병운동이다. 1930년대 대장정을 떠난 중국공산당 홍군이 쓰촨을 우회했다. 장제스(蔣介石·장개석)의 국민당 정부는 일본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충칭(重慶)에 임시정부를 세웠다. 청두에는 유수의 대학들이 몰려들었다. 망국의 시기 쓰촨은 후방의 병참기지 역할을 맡았다.



쓰촨의 고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958년 중소분쟁이 터졌다. 1964년 북베트남 경비정과 미 해군 구축함이 충돌한 통킹만 사건이 발생했다. 베트남 전쟁의 시작이다.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은 중국 경제의 목줄인 주요 공장들이 모두 연해 지방에 몰려 있는 현실을 우려했다. 소련과 미국의 위협에 대비해야 했다. 1964년부터 1980년까지 17년간 제3선 건설이 시작됐다. 연해의 공장들이 쓰촨으로, 또 청두로 이사했다. 수백만 명의 인구가 청두로 몰려들어 왔다.









삼성퇴 유적지에서 발굴된 청동 무사 입상.



화끈하게 매운 쓰촨 요리의 총본산



삼국시대 촉나라의 관리 장봉(張奉)이 사신으로 오(吳)나라에 갔다. 그는 손권(孫權)이 베푼 연회자리에서 불손하게 굴었다. 이를 못마땅해한 오나라 신하 설종(薛綜)이 물었다. “선생께서는 ‘촉’이 무슨 뜻인지 아시오?” 장봉이 말문이 막혔다. 설종은 “개[犭·견]가 있으면 ‘독(獨)’이요, 개가 없는 것이 촉(蜀)이오. 눈이 옆으로 찢어져(罒) 몸을 구부려(勹) 구차하게 아첨하며 그 배 속에 벌레(虫)가 들어있는 것이오”라며 비아냥거렸다.



쓰촨을 뜻하는 한자 ‘촉’은 위의 일화처럼 배 속의 벌레라는 뜻이 아니다. 접시꽃(蜀葵·촉규) 위에 사는 애벌레를 말한다. 촉이 비단을 처음으로 만든 곳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촉이 ‘복중지충(腹中之蟲)’의 모습인 것처럼 청두 사람들은 먹는 것을 좋아한다.



쓰촨 요리는 맵기로 유명하다. 중국에서는 고추를 라자오(辣椒)라고 부른다. 16세기 후반에야 중국에 전해졌다. 처음 들어온 곳은 해안의 저장(浙江)성이었다. 강남의 신선한 요리에 고추는 어울리지 않았다. 내륙인 후난성에 전해진 뒤에 인기를 끌었다. 고추의 사투리 하이자오(海椒)는 이렇게 생겼다. 대이민의 물결과 함께 고추가 쓰촨으로 들어왔다. 이민자들에게는 험난한 여정과 농지 개간의 어려움을 견딜 자극제가 필요했다. 입안이 얼얼할 정도로 매운 마라(麻辣)가 쓰촨 요리의 대명사가 된 연유다.



쓰촨 총독 정보정(丁寶楨)은 궁바오지딩(宮保鷄丁)이란 중국의 기본 요리를 만들었다. 개인 요리사를 대동하고 쓰촨에 부임한 고관대작들은 쓰촨 요리를 한층 더 풍부하게 했다. 1861년 만주족 관정흥(關正興)은 청두에 자신의 이름을 딴 정흥원(正興園)이란 식당을 열었다. 정흥원은 쓰촨 스타일을 접목한 만한전석 요리로 유명했다. 특히 정흥원은 쓰촨 요리사들의 요람이었다. 신해혁명이 발발하자 정흥원은 문을 닫았다. 이곳에서 일하던 요리사들이 각자 독립해 식당을 열었다. 쓰촨 요리는 20세기 초 중화요리의 최고봉으로 굴기했다.



붉은 고추기름이 둥둥 뜬 솥에 고기를 데쳐 먹는 중국식 샤부샤부 훠궈(火鍋) 역시 쓰촨이 고향이다. 20세기 초 전까지는 하급노동자 쿠리(苦力)들의 먹을거리였다. 이후 훠궈는 고관대작을 비롯해 전 중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요리가 됐다. 지금은 한국을 비롯해 전 세계에 보급돼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2010년 2월 유네스코는 청두시를 맛있는 음식의 도시(美食之都)로 선정했다. 청두시가 그동안 국제미식관광축제 등 다양한 국제규모의 미식행사를 벌여온 성과다. 청두시는 연간 수천만 명의 미식 관광객을 끌어들이고 6조원을 벌어들이는 요식업의 강자다. 지금도 끊임없이 변화 발전하는 쓰촨 요리가 어떤 먹을거리로 우리의 입을 즐겁게 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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