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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한·일 다문화 가족…한 지붕 아래 19명 오순도순

중앙일보 2011.05.02 19:47










중3인 이권진(15)군은 동생이 10명이나 된다. 엄마·아빠를 포함해 함께 사는 어른만 해도 8명이다. 외할아버지·외할머니, 엄마·아빠, 동생들과 한 집(3층)에서 산다. 바로 아랫층에는 첫째·둘째 이모 가족이 살고 있다. 한 지붕 아래 세 가족이 모여 사는 셈. 동네에서는 ‘일본인 세자매가 사는 집’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



 히로시마 출신인 요리구치 토루(71)와 요리구치 쿄코(65) 부부는 모모코(46)·타즈(42)·키요(37) 세 자매를 두었다. 우연하게도 세 딸 모두가 한국인과 결혼해 한국에서 살고 있다. 세자매가 일본에 살던 친정 부모를 한국으로 모셔오면서 온 가족이 일산에 모여 살게 됐다. 첫째 딸 모모코 가족이 지금 살고 있는 건물 201호에 이사온 것은 지난 1996년. 7년 뒤인 2003년, 3층에 살던 주인이 다른 아파트로 이사를 간다며 “식구가 많으니 2층보다 훨씬 넓은 3층에서 살 생각은 없는지”를 물어왔다. 입버릇처럼 ‘온 가족이 모여 살았으면 좋겠다’고 했던 부모님 생각이 난 모모코는 그들을 모시고 살기로 결심하고 3층에 새 둥지를 틀었다. 그리고 201호에는 막내 동생 키요 가족이 들어왔다. 이어 202호 세입자가 이사를 가자 둘째 타즈 가족까지 옮겨 왔다. 세 자매가 대식구를 이뤄 한 지붕 아래 살게 된 것이다.



 모모코와 이신용(46)씨 부부는 권진(남·15)·여진(여·14)·여나(여·12)·권수(남·9)·여정(여·2) 5남매를 두었다. 둘째 딸 타즈와 민광덕(43)씨 부부는 주나(여·10)·승조(남·7)·승기(남·1) 3남매, 막내 딸 키요와 김진석(41)씨 부부는 효선(여·9)·효은(여·7)·진우(남·4) 3남매를 각각 키운다. 가족은 모두 19명에 이른다.



 3층 권진이네만 해도 9명의 대가족이다. 방도 5개다. 아빠·엄마와 막내 여정이가 함께 방 하나를 쓴다. 나머지는 외할아버지·외할머니 방, 여진·여나 방, 권진·권수 방, 공동 공부방 등으로 사용한다. 커다란 거실은 3층 식구 9명을 위한 공간일 뿐 아니라 19명 온 가족의 놀이터이면서 식당이자 휴식 공간이다.



11명의 아이들은 사촌이자 둘도 없는 친구



 모모코의 넷째 권수와 키요의 첫째 효선이는 아홉살 동갑내기다. 같은 학교에 다니는 데다 반도 같다. 함께 등교를 하거나 머리를 맞대고 숙제도 같이 한다. 야무진 효선이는 개구쟁이 권수가 하는 장난을 받아주고, 때론 잘못된 행동도 바로 잡아주는 둘도 없는 친구 사이다.



 수학을 잘하는 권진이는 동생들이 우러러 보는 ‘큰 오빠’이자 ‘맏형’. 시간 날 때마다 동생들 공부를 봐준다. 재작년엔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효선이를 위해 수학 과외선생님 역할까지 했다. 둘째 이모가 지급한 과외비는 시간 당 1000원. 많은 액수는 아니지만 동생의 공부를 봐주며 뿌듯해 했던 권진이에겐 기분 좋은 보너스다.



 유치원에서 돌아온 일곱살 효은이는 집에 가방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3층으로 뛰어 올라간다. 지난 2월 말 태어난 사촌 남동생 승기를 보기 위해서다.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장가를 불러주는 등 제법 누나 역할을 한다.

 

할일 척척 해내는 아이들, 주부 9단인 할아버지



 늘 부산한 3층은 아침이면 더욱 소란스럽다. 식구 6명이 집을 나설 채비를 하기 때문. 아이들은 각자 할 일을 척척 잘 해낸다. 중학생인 권진, 여진이는 물론 개구쟁이 권수도 혼자서 학교 갈 준비를 한다. 준비가 끝나면 초등 5학년인 여나가 주나·효선·권수를 이끌고 학교로 향한다. 같은 유치원에 다니는 승조와 효은이는 키요가 데려다 준다. 진우와 여정이를 어린이집에 데리고 가는 것은 할아버지 몫이다.



 각자 집에서 식사를 하더라도 식탁에 오르는 반찬에는 별 차이가 없다. 바로 이 집의 요리 담당인 외할아버지 토루가 만든 음식이기 때문. 그는 언제나 넉넉히 음식을 만들어 아래층 두 집으로 내려 보낸다. 류마티즘으로 다리가 불편한 아내를 돕고, 타국에 와서 여러모로 바쁜 딸들을 위해 주방에 드나들기 시작한 그는 이제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하는 ‘주부 9단’이 됐다. 그가 만든 수타 우동과 오코노미야키는 “식당에서 먹는 것보다 훨씬 맛있다”는 평가를 받으며 인기 가족 메뉴로 등극했다.



 이제 세 자매는 모두 ‘전생에 한국인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한국 아줌마가 다 됐다.어른들 대화를 들으며 자란 아이들은 일본어·일본 문화에도 익숙하다. 이 특별한 가족이 어우러져 사는 중심에는 요리구치 집안의 3가지 가훈인 ‘유산을 남기지 말라’ ‘출세하지 말라’ ‘바보처럼 살라’ 등이 자리잡고 있다. 쓸 만큼만 벌고 나머지 시간과 노력은 가족들에게 쏟을 것이며, 다른 이를 밟고 올라서지 말고, 남을 위해 베풀며 살라는 의미다. 셋째 사위 김진석씨는 “이런 원칙 때문인지 열아홉 대식구가 행복하게 조화를 이루며 살고 있다”고 말했다.



[사진설명] 왼쪽부터 셋째 딸네. 김진석(41)·효은(7)·효선(9)·진우(4)요리구치 키요(37). 둘째 딸네. 승기(1)민광덕(43)·승조(7)·주나(10)·요리구치 타즈(42). 요리구치 토루(71)·요리구치 쿄코(65)  ▲첫째 딸네. 요리구치 모모코(46)·여나(12)·여진(14)·권진(15)·권수(9)·여정(2)이신용(46).



<글=하현정 기자 happyha@joongang.co.kr/사진=황정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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