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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15) 펑더화이

중앙일보 2011.05.02 10:01



전장의 영웅 펑더화이도 인생 앞에선 ‘보통사람’









펑더화이(彭德懷·팽덕회)는 원수 계급장에 국무원 부총리, 국방부장을 역임했지만 개인적으론 불우했다. 관상 잘 보기로 유명한 사람이 “평생 고생할 상”이라며 돈도 받지 않았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였다. 특히 여자 복과 음식 복이 없었다. 전쟁터에서 보낸 기간도 중국 역사상 가장 길었다.



약혼자가 자살한 후 술집 출입을 자주했다. 맘에 쏙 드는 가기(歌妓)가 있었다. 몸가짐이 단정해 주인에게 얻어맞기가 일쑤라는 말을 듣자 빌린 돈으로 빚을 갚아 줬다. 여자가 당차고 똑똑했다. “고마운 일이지만 나는 너같이 생긴 사람이 싫다. 밥하고, 빨래하고, 심부름하며 은혜를 갚겠다.” 펑더화이는 고향에 가라며 여비를 쥐여줬다. 역시 대장부라며 뒤에서 끼득거리는 동료가 많았다.



24세 때 장교가 되자 행상의 딸과 결혼했다. 열네 살짜리 어린 신부였다. 여자들의 모범이 되라며 쿤모(坤模·곤모)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전족을 풀어주고 글을 깨우치게 했다. 총명한 여자였다.



1928년 가을 핑장(平江)에서 폭동을 주도했다.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의 난창(南昌) 폭동,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의 창사(長沙) 폭동, 장타이레이(張太雷·장태뢰)의 광저우(廣州) 폭동과 함께 중공이 일으킨 4대 폭동 중 하나였다. 펑은 홍군과 합류하기 위해 징강산(井岡山)을 향했다. 쿤모는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혁명이 성공하면 보자.”















1928년 가을 핑장(平江)에서 폭동을 주도했다.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의 난창(南昌) 폭동,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의 창사(長沙) 폭동, 장타이레이(張太雷·장태뢰)의 광저우(廣州) 폭동과 함께 중공이 일으킨 4대 폭동 중 하나였다. 펑은 홍군과 합류하기 위해 징강산(井岡山)을 향했다. 쿤모는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혁명이 성공하면 보자.”



쿤모는 비적의 여자라며 손가락질을 받았다. 단 하루도 맘 편하게 살 수가 없었다. 떠돌이 생활을 하던 중 펑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좋다는 사람이 나타나 결혼식을 올렸다.



국공합작으로 항일 전쟁이 시작됐다. 홍군도 팔로군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연일 신문에 “팔로군 부사령관 펑더화이”의 이름이 실렸다. 린뱌오(林彪·임표)가 핑싱관(平型關)에서 일본군을 전멸시켰다는 보도를 접한 쿤모는 펑에게 편지를 보냈다. 겉봉에 “핑싱관 펑더화이”라고만 썼다. 굶어 죽은 줄 알았던 부인의 편지를 받은 펑은 빨리 옌안(延安)으로 오라며 방법을 적어 보냈다.



쿤모가 남편이라는 사람과 딸을 데리고 나타났다. 펑더화이는 난감했다. 당대의 대전략가들이 즐비한 옌안이었지만, 그 누구의 머리에서도 뾰족한 해결책이 나오지 않았다. 천하의 마오쩌둥도 도움이 안 됐다. 일자리를 구해 주고 전쟁터로 떠났다.



10년간 부인만 기다렸다는 소문이 퍼지자 펑더화이는 여자들 사이에 인기가 치솟았다. 어떻게 생긴 사람인지 구경이라도 한번 해야겠다며 기웃거리는 여인이 많았다. 작가 딩링(丁玲·정령)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미국 여기자 한 명은 최전선까지 찾아와 “내가 싫으면 할리우드식 연애라도 하자”며 노골적인 표현을 서슴지 않았다. 펑더화이가 말귀를 못 알아 듣자 저렇게 눈치 없는 사람은 난생처음 보겠다며 짐을 꾸렸다.



나이 40이 돼 그 유명한 ‘푸씨 3자매’의 막내 푸안슈(浦安修·포안수)와 결혼했다. 사이가 좋았지만, 50년대 말 마오를 비판하고 실각하자 푸의 태도가 전과 같지 않았다. 펑더화이가 배(梨)를 반으로 잘랐다. 푸가 받아 먹자 펑도 반쪽을 먹었다. 결국은 남이 되고 말았다. 리(梨)는 이별(離)과 발음이 같다. 연인이나 부부 사이에 배를 나눠먹는 것은 결별을 의미한다.



펑더화이는 인생의 대부분을 전쟁터에서 보냈다. 제대로 된 음식을 먹을 기회가 적었다. 한국전 참전 기간에는 미숫가루만 먹을 때가 많았다. 평생 위장병에 시달렸다. 중국인들은 수천 년 동안 음식과 남녀관계를 가장 중요시 여겼다. 남들이 부러워할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삶이었다.

1987년 펑더화이의 옛 집을 찾은 쿤모는 시 한 수를 남겼다. “칼 찬 모습 찾을 길 없고, 영웅의 눈물인가, 바람만 나를 반긴다. 천지를 바꿔놓은 대장군을 그리며 언덕을 헤맨다.” 이 황당한 여인은 펑에 관한 책도 한 권 펴냈다.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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