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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구 칼럼] ‘문명의 충돌’과 열린 문화의 선택

중앙일보 2011.05.02 00:03 종합 39면 지면보기






이홍구
전 총리·중앙일보 고문




1993년 『외교정책』에 실렸던 새뮤얼 헌팅턴의 시론 ‘문명의 충돌’은 20세기 말과 21세기 초에 걸쳐 전개된 거대담론의 주제가 돼 왔다. 세계사의 전환기가 지닌 역사적 성격을, 그리고 지구촌 전체를 위협하는 천하대란의 원인과 향방을 명료하게 제시했을 뿐 아니라 2001년 9·11테러를 논리적으로 예측했다는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지난 20년 미국이 개입한 중동사태의 흐름은 마치 헌팅턴의 예언을 현실화하는 과정처럼 보였다.



 17세기로부터 20세기 초 제1차 세계대전까지 계속된 제국주의 시대는 세계를 제패한 서구세력들만의 이권쟁탈전이었고, 1917년 볼셰비키혁명으로부터 동서 냉전의 막이 내린 90년까지의 이데올로기 시대는 서구세력의 독점시기가 점차 서구와 비서구의 여러 세력이 뒤얽히는 전 지구적 충돌의 시대로 넘어가는 과정이었다. 바로 이러한 새로운 지구촌 시대에 기독교 윤리를 바탕으로 하여 개인주의·다원주의·민주주의를 제도화한 서구문명과 근대적 국민국가보다는 종교적 신앙과 교조적 규범을 절대 우선시하는 이슬람문명의 충돌은 피할 수 없는 코스라는 것이다.



 이러한 헌팅턴의 문명충돌론에 대한 재검토의 필요를 뉴욕 타임스 데이비드 브룩스가 3월 초 그의 칼럼에서 제기했다. 그간의 중동사태는 헌팅턴의 문명충돌론을 뒷받침하는 측면이 강하지만 이슬람 지역에서 근래에 불어닥치고 있는 민주화 물결은 그 이론의 수정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아랍 이슬람권에 속하는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국민국가나 민주주의를 수용할 수 없기에 서방세계와 이슬람권은 동화(同化)보다는 서로 양립하는 것이 문명의 충돌을 예방할 수 있다는 헌팅턴의 입장이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원천적 오류라고 브룩스는 지적한다. 인간의 특성은 영구불변의 단일성보다는 잠재적 다양성을 지니고 있으며, 독재자에 의한 공포정치 시대이든 자유로운 의사 분출이 가능해진 오늘의 상황이든 주어진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다른 형태로 표출된다는 것이다.



 ‘문명의 충돌’을 둘러싼 담론에 우리가 개입할 필요는 없지만 서양문명이나 이슬람문명과는 전통과 위치를 달리하는 우리의 입장이 과연 무엇인지를 일단 정리해 보는 게 적절한 역사적 시점인 것 같다. 짧았던 미국의 유일 초강대국 시대를 넘어 세계는 정치·군사·경제 등 모든 영역에서 다원화 및 다극화 시대로 접어들었다. 이러한 새 시대를 맞아 모든 국가는 예외 없이 그들의 정통성을 밑받침하는 문명사적 정체성을 재창조해야만 하는 시대적 사명을 떠안게 된 것이다.



 특히 한국의 경우 조선왕조의 쇠퇴와 식민지의 시련 속에서 추진된 독립국가 건립 노력은 세계사의 변두리에 머물지 않고 그 중심에 합류하겠다는 민족적 여망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100년에 걸친 우리의 고행은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성취한 모범 국가로 꼽히기에 이르렀지만 새 다극화 시대의 소용돌이 속에서 어떤 자세와 방향을 선택할 것인지는 가히 민족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역사적 과제임이 틀림없다. 이에 임하는 한국의 입장은 이미 이심전심 국민적 합의로 우리의 의식과 생활 속에 뿌리내리고 있다. 전통적 가치와 문화를 창조적으로 보전하면서도 문명의 충돌을 피하고 지구촌의 평화와 번영을 모두 함께 가꿔 가자는 열린 문화를 선도하는 데 적극적으로 공헌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우리의 노력이 오늘의 국제환경에서 순조롭게 수용되기는 결코 수월치 않다. 우선 유교문화권의 전통을 바탕으로 동아시아의, 특히 한·중·일 3국의 지역공동체를 모색하려는 우리의 희망이 넘어야 할 벽은 아직도 높기만 하다. 헌팅턴은 유교문명과 일본문명은 별개로 취급하면서 일본을 준서구국가로 치부하고 있다. 주요 7개국(G7)의 회원임을 유난히 중시하는 일본의 입장이 어찌될지는 분명치 않다. 한편 중국이 유교문화의 인본주의적 보편성을 강조하면서도 중화 중심사상과의 연관성을 말끔히 정리할 수 있을지 역시 남아 있는 숙제다. 그런 가운데 60여 년에 걸쳐 안보동맹을 포함한 모든 영역에서 다져진 한·미 간의 특수관계와 동아시아공동체의 청사진을 조화롭게 연계시키는 데는 고도로 세련된 열린 문화의 창조적 작업이 필수요건이라고 하겠다. 그러기에 한반도의 이웃에서 있을 수 있는 문명의 충돌을 예방하기 위해 우리의 열린 문화는 창조적 비약과 알찬 내실화를 동시에 이룩해야 될 것이다.



이홍구 전 총리·중앙일보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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