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삶의 향기] 시시한 배역은 없다

중앙일보 2011.04.28 00:07 종합 33면 지면보기






주철환
중앙일보 방송설립추진단
콘텐트본부장




연예인 가운데 특별히 친한 사람 있느냐. 단골 질문 중 하나다. 친하다는 기준이 뭔가. 가끔 만나서 밥이라도 함께 먹는 사이라면 주저함 없이 탤런트 김혜자씨를 꼽는다.



 어떤 인연인지 궁금한가. 실은 그분이 ‘전원일기’ 출연할 때부터 녹화 있는 날이면 잠깐이라도 분장실에 들러 인사한 게 시작이었다. 처음엔 왜 예능PD가 마실 걸 들고 찾아올까 의아해 하다가 진짜로 자신의 팬이라는 걸 확인하고는 그분도 즐겁게 맞아주셨다. 꾸준한 진심이 통한다는 건 인지상정의 순리니까.



 대학생 여섯 명과 수요일 저녁 시간에 밥도 먹고 영화도 보는 모임을 정기적으로 갖고 있다. 며칠 전엔 김혜자씨도 합석했다. (시간이 그렇게 많으냐고 물으면 ‘임도 보고 뽕도 따는’ 일이라고 답할 참이다.) 영화 제목은 ‘세상의 모든 계절’(원제 Another Year). 첫 장면에 등장하는 배우는 불면증에 시달리는 50, 60대 여성인데 표정 연기가 리얼했다.



 의사가 그녀에게 묻는다. “당신의 행복점수는 10점 만점에 몇 점인가요?” 퉁명스러운 그녀가 별다른 고뇌 없이 내뱉은 점수. 고작 1점이었다. 의사의 진단도 대범했다. “행복해질 여지가 많으시군요.”



 김혜자씨가 옆자리에서 속삭인다. “저 배우 연기 참 잘한다.” 국민배우에게 칭찬을 받은 외국배우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할 텐데. 하지만 이후 어떤 장면에도 그 배우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녀가 주인공인 줄 알았던 일부 관객들은 마이크 리 감독의 야속함에 약간은 서운했을 것이다.



 영화가 펼쳐지는 중에도 김혜자씨는 한숨처럼 내뱉는다. “그 여자 또 나왔으면 좋겠다.” 극장을 나오면서까지도 아쉬움이 남았나 보다. “그런 역이라면 나도 하고 싶은데….”



 오래전 김혜자씨에게 던졌던 질문 하나. “선생님은 작품을 고르는 기준이 뭔가요?” 소녀처럼 미소 지으며 내던진 얄미운 대답. “주인공이죠.” 맞다. 그녀는 주연이 아니면 애초에 출연을 안 했던 거다. 그리고 그 약속(?)을 몇십 년간 지켜왔다. 주로 엄마 역할을 했지만 화난 엄마(‘엄마가 뿔났다’)부터 ‘미친’ 엄마(영화 ‘마더’)까지 그녀는 명실상부한 주인공이었다. 예외적으로 드라마 ‘궁’에서는 주인공이 아니었는데 이걸 놓치지 않고 따져(?) 물었더니 그 선택의 변도 그녀다웠다. “주연은 아니지만 황태후 역할이라서….”



 ‘시시한 배우는 있어도 시시한 배역은 없다’는 게 이 세계의 불문율이다. 주역이냐, 조역이냐보다 중요한 건 적역이냐 현역이냐다. 적임자를 찾는 게 연출의 일이고 적임자가 되는 게 기회가 주어진 배우의 소명이다. 그런 면에선 적임자와 책임자가 동의어다.



 행복의 기준도 일터를 기반으로 보자면 ‘적재적소’다. 모름지기 스승의 역할은 제자의 개성을 살려주고 덕성, 지성, 근성, 정성을 길러주는 일과 더불어 적성을 찾도록 돕는 데 모아져야 한다. “행복점수를 올리려면 중역이나 주역이 되는 게 아니라 현역이고 적역이어야 하느니라.” 그날 종례 시간에 악수하며 던진 나의 교훈이다.



주철환 중앙일보 방송설립추진단 콘텐트본부장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