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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아의 여론女論] 근대화와 번역의 힘

중앙일보 2011.04.28 00:06 종합 33면 지면보기






이영아
건국대 몸문화연구소
연구원




이해조의 신소설 『빈상설』(1908)에서는 허랑방탕한 생활을 일삼는 남자 주인공인 ‘정길’을 두고 “구학문으로 말하면 오장육부에 정신보가 빠졌다 할 만하고 신학문으로 말하면 뇌에 피가 말라 신경이 희미하다 할 만하다”고 말했다. 옛날식으로 말하면 ‘정신보’가 없는 것이지만, 근대적 학문 용어로 표현하자면 ‘신경이 희미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20세기 초에 처음 한국에 수입된 ‘신경’이라는 의학용어가 일상 속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예로 꼽히는 대목이다.



 ‘신경(神經)’은 18세기 일본인들이 ‘신기(神氣)’에서 ‘신(神)’을, ‘경맥(經脈)’에서 ‘경(經)’을 따서 만든 신조어였다. 일본인들은 네덜란드 상인들을 통해 접하게 된 독일의 쿨무스(Johann Adam Kulmus·1689~1745)가 쓴 『해부도』의 네덜란드 번역본을 보고 1771년 실제 해부 장면에 참여한 뒤, 『해부도』가 실제 인체의 모습과 정확하게 같음에 경탄했다. 서양의학의 경험적 정신에 크게 충격을 받은 일본인들은 곧바로 이 책의 번역에 착수해 『해체신서(解體新書)』(1774)를 펴냈는데 이때 ‘신경(神經)’ ‘해부(解剖)’ 등의 단어가 신학문 용어를 위한 번역어로 만들어졌다고 한다(여인석·황상익, ‘일본의 해부학 도입과 정착 과정’, 『의사학』, 1994).



 일본은 18세기부터 이미 ‘홍모(紅毛)외과’라고 불리는 네덜란드의 근대의학을 직접 받아들였다. 이 과정에는 통·번역자들이 외부 세계와 일본 사이에서 중개 역할을 톡톡히 했다. 일본의 서양문물에 대한 유연한 태도와 번역자들의 부지런함이 일본을 빠른 시간 안에 근대화·서구화하는 데 크게 기여한 것이다. 19세기에 일본이 동양에서 가장 먼저 근대화에 성공하고 제국 열강들과의 경쟁에서 뒤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러한 번역문화의 힘이었다.



 오늘날 한국사회는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추어야 한다면서 전 국민에게 영어 능통자가 되라고 강요하고 있다. 한국인들은 그야말로 ‘영어 앓이’ 중이다. 세계의 앞선 지식과 기술을 받아들이고 한국의 뛰어난 지식과 기술을 알리기 위한 매개체로서 영어가 할 수 있는 역할은 분명 크다. 하지만 이러한 소통은 훌륭한 번역가, 통역가에게 맡길 때 훨씬 더 정확하고도 효율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럼에도 영어를 중요시하는 현실에 비하면 한국의 번역가들에 대한 대우는 형편없다. 그러니 좋은 번역서도 흔치 않다. 지금 한국의 ‘영어교육 광풍’에 소모되는 에너지를 모아 전문 통·번역가를 육성하고 양질의 번역서를 출판하는 일에 쏟는다면, 그토록 바라 마지않는 ‘글로벌 코리아’는 좀 더 쉽게 달성되지 않을까.



이영아 건국대 몸문화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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