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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년 만에 열리는 ‘비밀의 장막’출구전략 시점 선택엔 신중할 듯

중앙선데이 2011.04.24 04:12
"중앙선데이, 오피니언 리더의 신문"


세계 금융시장 초미의 관심, 27일 버냉키 연준(Fed) 의장의 첫 기자회견









‘비밀의 사원’.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ed)의 별명이다. 1914년 출범한 연준은 그동안 빵과 포도주 대신 침묵과 모호함으로 신비로운 ‘돈의 제사’를 지내왔다. 하지만 27일 오후 2시15분(한국시간 28일 오전 3시15분) 마침내 비밀의 장막이 활짝 열린다. 벤 버냉키(58·사진) 의장은 97년 연준 역사에서 처음으로 기자들 앞에서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의 회의 결과를 설명할 예정이다. 이 순간 전 세계 금융시장 관계자들의 눈과 귀가 기자회견이 열리는 워싱턴 연준 본부의 마틴 빌딩으로 쏠릴 것으로 보인다.



각국 중앙은행이 공통적으로 시장과 상대하는 무기는 ‘토크(말)’와 ‘액션(행동)’의 두 가지다. 27일 연준의 액션에 대해선 “의문의 여지가 없다(not in doubt)”고 월스트리트 저널(WSJ)이 전했다. “연준이 기준금리를 제로 수준(연 0~0.25%)에서 동결하고 6월 말까지 미 국채 6000억 달러어치를 사들이는 2차 양적완화(QE2)는 예정대로 진행할 것”이란 게 이 신문의 관측이다. 파이낸셜 타임스(FT)는 “2차 양적완화는 6월 말로 종료되고 연준의 자산 매입은 이게 마지막일 것”이라고 내다봤다. ‘3차 양적완화’는 없을 것이란 뜻이다. 다음 FOMC는 6월 21~22일에 열린다.



연준 홈페이지서 생중계

자연스럽게 시장의 관심은 버냉키의 입에 쏠린다. 6월 이후 연준의 정책 방향에 대한 언급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동안 애널리스트들은 FOMC 발표문의 행간을 꼼꼼히 읽으며 향후 정책 방향에 대한 암시를 얻어왔다. 하지만 이달부터는 기자들과 질의응답을 통해 연준 의장의 생각을 직접 들을 수 있게 됐다는 점에서 엄청난 변화다. 연간 4차례 열리는 기자회견은 연준 홈페이지(www.federalreserve.gov)에서 생중계된다.



지금까지 연준은 선진국 중앙은행 가운데 언론에 가장 비우호적인 것으로 유명했다. 버냉키의 전임자인 앨런 그린스펀 연준 의장은 19년에 걸친 재임기간 중 언론과 접촉을 기피했다. 그린스펀은 의회 청문회에서 증언을 마친 뒤 기자들이 주위를 둘러싸고 질문하는 것조차 결코 응하지 않았다.







대신 그린스펀은 취임 7년째 되던 94년 2월 FOMC의 결정을 즉시 공개하는 결단을 내렸다. ‘비밀의 신전’을 감싼 장막을 일부 걷어낸 것이다. 초기엔 별도의 기자실을 운영하지 않는 연준이 재무부 기자실에 팩스를 보내 결정 내용을 알렸다. 그러면 기자단 간사가 팩스를 복사하고 출입기자 전원이 받은 것을 확인한 뒤 엠바고(보도 시점 제한)를 풀었다. 간혹 기자실 복사기에 종이가 걸리면 엠바고 해제가 늦어지는 해프닝도 있었다고 한다. 그린스펀의 공개 결정 전에는 은행들이 하루짜리 자금을 거래하는 ‘연방기금 시장(한국의 콜 시장과 유사)’의 금리 수준을 보고 어렴풋이 FOMC의 결정을 짐작했었다.



지역 대표 ‘긴축’ 목소리 높여

버냉키는 2006년 취임 직후 언론에 호되게 뒤통수를 맞은 ‘아픈 기억’이 있다. 비보도를 관례로 하는 파티에서 CNBC 기자에게 금리 인상을 시사한 발언이 보도되면서 시장을 대혼란에 빠뜨린 것이다. 이 사건 이후 버냉키는 “시장과 의사소통은 공개석상에서만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럼에도 버냉키는 애매모호함을 즐겼던 그린스펀과 철학이 달랐다. 투명성과 명료함이 버냉키의 확고한 소신이다. WSJ에 따르면 그는 유럽중앙은행(ECB)의 장클로드 트리셰 총재와 영국 중앙은행 머빈 킹 총재의 기자회견 비디오를 보며 조심스럽게 기자회견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메이저리그 보스턴 레드삭스의 열성 팬인 버냉키의 현재 심정은 첫 등판을 앞둔 선발투수와 비슷한 것으로 보인다.



기자회견을 하는 시점도 절묘하다. WSJ는 “최근 연준 내부의 논쟁은 유난히 시끄럽고 다채롭다(loud and colorful)”고 전했다. FOMC 위원들이 비둘기파(온건파)와 매파(강경파)로 갈라져 날카로운 논쟁을 벌이고 있다는 설명이다. 미국 경기의 회복세가 아직 확실치 않다고 보고 통화정책을 ‘완화’로 유지해야 한다는 쪽(비둘기파)과 인플레 기대심리를 억제하기 위해 통화정책을 ‘긴축’ 또는 ‘정상화’의 궤도로 되돌려야 한다는 쪽(매파) 간의 싸움이다.



FOMC는 연준 이사(집행부) 7명과 지역연준 총재 5명의 총 12명으로 구성된다. 대체로 지역연준 총재들은 매파, 버냉키를 비롯한 연준 집행부는 비둘기파의 성향을 보인다. 평소엔 과반수를 차지하는 집행부가 무난히 의사결정의 열쇠를 쥐게 된다. 그러나 현재 연준 이사 2명이 공석이란 점이 상황을 복잡하게 한다. 1명(케빈 워시)은 지난달 말 사임했고, 다른 1명(피터 다이아몬드)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후보로 추천했으나 의회의 인준을 받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집행부와 지역연준 총재가 5대 5의 동수를 이루고 있다.



매파는 지난달 15일 회의 이후 각종 강연과 언론 인터뷰를 통해 출구전략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쏟아내고 있다. 심지어 “악마와의 거래(토머스 호니그 캔자스시티 연준 총재)”라거나 “하이퍼 인플레를 겪었던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 꼴이 날 것(리처드 피셔 댈러스 연준 총재)”이라는 등 굉장히 센 표현도 나온다. FOMC에서 투표권은 없으나 발언권은 있는 7명의 지역연준 총재들까지 가세한다면 매파가 회의 분위기를 주도할 가능성도 있다.



S&P 신용등급 전망 하향도 부담

이달 초 공개된 지난달 FOMC 회의록을 보면 이런 분위기가 잘 드러난다. 표결은 만장일치였으나 토론에선 의견이 상당히 갈렸다. 1월 회의록에선 보기 드물었던 논쟁이 많아졌고, 출구전략들(exit strategies)이란 단어까지 등장했다. 출구전략이 단수가 아니라 복수로 표현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출구전략에는 꼭 금리인상이 아니라도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다는 뜻이다. 크레디트스위스그룹의 수석 이코노미스트인 닐 소스는 “만기가 돌아온 채권을 재투자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투자자들은 연준이 긴축을 향해 첫걸음을 내딛는 것으로 바라볼 것”이라고 말했다.



버냉키로선 높아져가는 매파의 목소리에 어느 정도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동시에 막대한 재정적자에 시달리는 오바마 정부의 어려움도 헤아려야 한다. 버냉키의 딜레마다. 신용평가회사인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S&P)가 18일 미국의 국가신용등급 전망을 ‘안정적’에서 ‘부정적’으로 낮춘 것도 부담이다. 만일 연준이 섣불리 긴축 카드를 꺼냈다가 국채 금리가 상승(채권값 하락)하면 재정난을 더욱 부추길 위험이 있다. 현재 금융시장은 신용 전망 하향의 충격에서 벗어나 안정을 되찾은 상태다. 다우지수는 18일 1만2200선까지 떨어졌다가 21일 1만2500선을 회복했고, 채권 금리(10년 만기 국채)는 21일 연 3.4%로 S&P 발표 전인 15일(3.41%)에 비해 약간 내렸다. 따라서 버냉키는 긴축의 시점을 선택하는 데 매우 신중할 것으로 보인다. 블룸버그 통신은 “6월 말까지 2차 양적완화를 끝낸 뒤에도 연준이 국채에 대한 재투자를 지속할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경제학 교수 출신인 버냉키의 전공은 1930년대 대공황이다. 스스로 ‘대공황 매니어’라고 부를 정도로 대공황 연구에 몰두했다. 따라서 대공황 당시 연준이 너무 일찍 긴축의 고삐를 당겼다가 경제를 더욱 침체에 빠뜨린 역사를 잘 알고 있다.



버냉키가 정치적으로 공화당에 가까우면서도 올 초 ‘국가부채 상한제’에 반대하며 오바마 정부의 손을 들어준 데엔 이런 배경이 있다. 그는 조지 W 부시 대통령 시절 백악관 경제자문위원장을 지냈다. 전임자였던 글렌 허버드 컬럼비아대 교수의 강력한 추천이 있었다고 한다.



버냉키를 연준 의장으로 발탁했던 부시 전 대통령은 자서전 결정의 순간에서 “벤의 가장 뛰어난 점은 역사에 대한 감각이었다. 그의 부드러운 몸가짐 이면에는 1930년대의 실수를 피하려는 강렬한 결의가 담겨 있었다”고 소개했다. 부시 전 대통령은 또 “벤은 인생의 많은 시간을 대학에서 보낸 사색적 분석가”라며 “누가 경제학자 아니랄까봐 입만 열면 ‘한편(on the one hand), 다른 한편(on the other hand)’이라 그러는데 손이 세 개가 아니길 천만다행”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주정완 jw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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