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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민 전 의원 인간 金大中 이야기<10>]“젊어 보이게 셔츠 소매를 걷으세요” … DJ

중앙선데이 2011.04.24 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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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계 복귀 마지막 관문, 지방선거

지나간 역사는 필연(必然)이란 말이 있다. 당시에는 잘 몰랐더라도 나중에 보면 매사에 다 이유가 있더라는 것이다. 1994~95년 사이 DJ의 행보가 그랬다. DJ의 한 포석, 한 포석은 결과적으로 정계 복귀에 유리한 환경을 창출해 냈다. 자서전을 출간하고, 아태재단을 만들고, 일산으로 이사하고, 한반도 주변 4대 강국을 순방하고, 민주당 내 동교동 계파를 결성하고, 강연을 하고, 통일 문제를 언급하고, 그 밖에 수많았던 모든 언행의 배경에는 정치를 향한, 그리고 재기를 꿈꾸는 DJ의 불타는 집념이 있었다. 독일 철학자 니체가 말한 이른바 권력의지(權力意志·Der Wille zur Macht)다. 대한민국 정치사에서 DJ 만큼 권력의지가 강한 인물도 찾기 어려울 것이다. 끈질김, 집요함, 굴욕을 참아 내는 인내, 상황에 재빨리 반응하는 순발력, 탄압에 맞서는 용기…. 아마 김영삼(YS) 전 대통령만이 거기에 필적할 수 있을 것이다. DJ와 YS를 비난하고 비판할 순 있지만 그들이 대통령이라는 최고권력을 거머쥔 데는 그야말로 다 이유가 있었다.



DJ는 95년6월 27일에 치러지는 지방자치제 선거를 정계 복귀를 위해 넘어야 할 마지막 관문으로 여겼던 것 같다. DJ는 야당 총재나 하려고, 혹은 국회의장직을 위해 정계에 복귀하려는 게 아니었다. 목표는 단 한 자리, 바로 대통령이었다. 지방선거에서 야당이 이겨야만 그게 가능해진다는 게 DJ의 판단이었다. 모든 것을 걸 수밖에 없었다.









1995년 지방선거는 DJ가 넘어야 할 마지막 관문이었다. 서울시장이 핵심이었다. DJ는 조순(가운데) 전 부총리를 영입해 승부수를 던졌다. 왼쪽은 민자당 정원식, 오른쪽은 무소속 박찬종 후보다. [중앙포토]







가장 중요한 게 서울시장 후보 영입이었다. 세 사람이 대상이 됐다. 이회창 전 총리, 조순 전 부총리, 고건 명지대 총장이다. 지난 호에서 말했듯이 DJ는 이 전 총리 영입에 부정적이었다. 그가 정치적 야심이 크다고 봤기 때문이다. 이종찬 고문이 찾아갔었다. 이 전 총리는 “국무총리까지 지낸 사람이 어떻게 서울시장을 하겠느냐”며 난색을 표시했다. “지명직이면 몰라도 선출직은 다르다. 프랑스 자크 시라크 대통령도 파리시장 출신이 아니냐”고 설득했지만 이 전 총리는 “생각해 줘 고맙지만 안 되겠다”고 거절했다. 행정관료 출신인 고건 명지대 총장도 부정적 반응을 보였다.



DJ는 조순씨를 영입하고 싶어했다. 한데 당사자가 계속 망설였다. 1월 27일에는 “민주당 사람을 만난 적이 없고, 거기 들어갈 생각이 없다”고 발표했다. 낭패였다.



이런 가운데 이기택 대표 쪽에서 이회창 전 총리를 접촉하려 했다. 이 대표 측 강창성(전 보안사령관) 의원이 2월 6일 이 전 총리와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물론 비밀리에였다. 이 만남은 무산됐다. 언론에 사전에 보도가 돼 버려서다. 이 전 총리는 “만나지도 않았는데 왜 보도가 나오느냐”며 불쾌해했다고 한다. 만일 이 만남이 성사돼 이 전 총리가 이기택 대표와 극적으로 손을 잡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DJ는 입장이 매우 곤란해졌을 것이다. 이 대표 쪽에선 “동교동계가 회동을 무산시키려 언론에 정보를 흘렸다”고 노발대발했다. 하지만 증거가 없었다.



조순 전 부총리 영입 마무리는 권노갑 최고위원이 했다. 권 최고위원은 4월 6일 일본으로 가 제국호텔에 묵고 있던 조순씨를 만났다. 그는 “경선하자는 데 나는 조직도 없고 돈도 없다”고 말했다. 권 최고위원은 “동교동계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 말라”고 약속했다. 조 전 부총리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 무렵 아태재단은 문전성시였다. 지방선거에서 DJ의 영향력과 공천권을 의식한 의원들이 문지방이 닳도록 찾아왔다. 정당 총재실을 방불케 했다. DJ도 문호를 개방했다. 예전에는 오해받기 싫다며 의원들을 안 보는 경우가 많았다. 이때부터는 거침없이 만났다. 그럴수록 이기택 총재(2월 임시전당대회에서 이 대표는 총재로 선출됐다)는 애가 닳았다. 지방선거 공천 주도권을 DJ가 가져가 버리고, 의원들도 아태재단으로 몰려가니 그럴만했다.



4월 8일, 민주당 조세형 부총재가 동교동으로 찾아왔다. 조 부총재는 한 해 전인 94년 9월 이미 서울시장 출마를 선언하고 열심히 선거운동을 해 왔다. 조 부총재는 DJ에게 “경선에 개입하지 않는다고 말씀해 달라”고 요구했다. DJ는 입장이 곤란했다. 마음은 조 순에게 가 있지만 그간의 정리를 따져 볼 때 조 부총재를 매몰차게 대할 처지도 아니었다. DJ는 정치적으로 답변했다. “나는 중립이다. 개입하지 않겠다. 그러나 당내 경선이 과열되면 우리가 영입한 좋은 후보가 상처를 받는다. 그럼 본선에서 바람직하지 못하다.” 중립을 지키겠다면서도 본선에 나갈 건 영입 후보임을 암시한 것이다.



정치에선 아전인수(我田引水)가 다반사다. 조 부총재는 밖에 나가 “DJ가 엄정중립을 지키기로 했다”고 공개적으로 말하고 다녔다. 동교동계는 당황했다. 대의원들이 혼선을 일으켜 조 전 부총리가 떨어지는 사태가 발생할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다급해진 동교동은 “DJ가 조순 지지 의사를 밝혔다”고 기자들에게 흘렸다. DJ도 “조순 지지가 사실이냐”고 기자들이 물으면 부인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조순 전 부총리는 4월 22일 민주당에 입당했다. 오전 8시30분에 이기택 총재와 만나기로 돼 있었다. 한데 이 총재는 9시가 넘어서 나타났다. 화가 날 만도 했다. 조 전 부총리가 당사로 온다는 사실을 오전 1시가 넘어서 통보받았기 때문이다. 입당 기자회견장에는 이 총재 측 당직자들은 모두 불참했다.



조 전 부총리는 24일에는 DJ를 찾아가 만났다. 다음 날인 25일 북아현동 자택으로 이기택 총재를 방문하려 했으나 이 총재는 선약이 있다고 거절했다. 가뜩이나 지방선거 영입 주도권을 뺏겨 기분이 나쁜데 당 총재인 자기를 놔두고 DJ부터 찾아간 데 대해 심기가 불편했던 것이다.



서울시장 후보 경선은 5월 3일 잠실 역도경기장에서 열렸다. 800여 명의 대의원과 당원이 참가했고 참관인도 3000명이었다. 1차 투표에서 조 전 부총리는 1등은 했지만 320표에 그쳐 과반수인 417표에 한참 모자랐다. 나머지를 조세형·홍사덕·이철 의원이 나눠 가졌다. 하지만 2차 결선 투표에서 조 전 부총리는 495표를 얻어 조세형 부총재를 183표 차로 누르고 당선됐다. 조 전 부총리는 “정권 교체에 기여하겠다”고 연설했다.



DJ는 조순 후보를 당선시키려고 혼신의 힘을 다했다. 6월 초 마포 서교호텔 꼭대기 층에는 공식 선거운동본부와는 별도로 비밀리에 ‘조순 당선대책위원회’가 꾸려졌다. DJ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DJ는 매일 출근하다시피 했다. 조 후보와 권노갑 최고위원, 정대철 선대위원장, 이해찬 선대본부장, 이종찬 고문 등 극소수만 여기에 드나들었다. DJ는 모든 걸 코치했다. 조 후보에게 모자를 쓰라고 권했다. 미국 대통령들도 캐주얼하게 보이려고 모자를 쓴다는 것이다. 양복 상의도 가능하면 벗으라고 했다. 와이셔츠를 입고 소매를 걷어 젊은 분위기를 만들라고 주문했다. 당시 여론조사 1위는 무소속의 박찬종 후보였다. DJ는 박 후보를 깰 비책도 전수했다.

“박찬종 후보는 말이 청산유수예요. 그러니까 말로 이기려 하면 안 돼요. 조 후보는 말솜씨보다는 좀 어눌하게 보여도 성실하고 진실된 자세로 토론에 임해야 해요. 국민에게 신뢰를 받는 방향으로 토론을 해야지 말솜씨로 맞대응하면 안 돼요.”



DJ의 일생에서 다른 사람을 위해 복장 코디네이터를 하고, 토론 코치를 한 건 아마 처음일 것이다. 그런데도 조 후보의 지지도는 뜨지 않았다. 선출 과정에서 벌어진 당내 갈등의 후유증도 남아 있어 운동원들도 열심히 뛰지 않았다.



DJ는 극약처방을 했다. 직접 선거판에 뛰어든 것이었다. 그 결정을 내리기까지 고민이 많았다. 누가 봐도 DJ의 정치 복귀였고, 자칫하면 지방선거의 모든 쟁점이 여기에 모아질 가능성이 농후했다. 게다가 DJ가 지원유세를 다녔는데도 패배한다면? 그 결과는 끔찍한 것이었다. 하지만 외통수였다. 6월 14일, DJ는 민주당의 선거운동원으로 등록했다. 무슨 일을 하든 먼저 논리를 제시해야 하는 DJ의 방식대로 이번에도 아태재단에서 지원유세에 나서는 이유를 밝혔다. ‘민주당과 후보들의 요청을 당원으로서 거부할 수 없고, 야당 탄압에 대응해야 하며, 정계 은퇴 때 민주당의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는 이유 등을 들었다. 그러면서도 “이번 유세는 정계복귀와 상관없다”고 방어막을 쳤다.



여당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민자당은 “정계 은퇴는 대국민 사기극”이라고 맹공했다. 박범진 대변인은 “흘러간 물에 다시 발을 담글 수 없는 법”이라고 했다. 민자당은 세대교체론을 들고 나왔다. 그건 DJ만 겨냥한 게 아니었다. YS와 갈등을 벌이다 그해 2월 9일 민자당을 탈당해 자민련을 창당한 김종필(JP) 총재까지 한 묶음으로 공격하는 카드였다.



현직 대통령 YS로부터 공격을 받는 두 사람, DJ와 JP는 서로 보듬기 시작했다. DJ의 정계 복귀 논란에 대해 JP가 한마디 했다. “누가 정치하겠다는데 그걸 안 된다고 할 수는 없는 거다. DJ가 정계 복귀를 하든 말든 논쟁이 될 게 없다.” 반(反)YS를 향한 두 사람의 마음의 연대는 이미 그때부터 형성되고 있었다.



6·27 지방선거에서 민자당은 완패였다. 부산, 인천, 경기도, 경남북 등 5곳에서만 승리했다. 민주당은 서울과 광주, 전남북을 석권했고 자민련이 대전과 충남북, 강원도를 차지했다. 제주와 대구에선 무소속이 이겼다. 정국은 본격적인 후삼국 시대로 접어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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