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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와 민권을 위해 …기타를 무기로 부조리와 싸우다

중앙선데이 2011.04.24 01:39 215호 32면 지면보기
샤브타이 지젤 벤 아브라함(Shabtai Ziesel ben Avraham)이라는 이름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바로 1960∼70년대를 풍미한 미국 가수 겸 작곡가이며 시인·화가·극작가이기도 한 밥 딜런(Bob Dylan·사진)의 히브리어 이름이다. 딜런은 41년 미네소타주 호수 지역의 조그만 마을에서 로버트 짐머맨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우크라이나 오데사에서 살던 부모는 모두 유대인이었고, 20세기 초 동유럽 유대인 박해(일명 ‘포그롬’)를 피해 1905년 미국에 정착했다. 당시 우크라이나 키예프·오데사 등 양대 도시에는 유대인이 많이 살았는데 미국 유대인 중 상당수가 이 지역 출신의 후손이다.

박재선의 유대인 이야기 포크송·히피문화의 아이콘 밥 딜런

공부에는 별 관심이 없던 딜런은 라디오방송에서 흘러나오는 블루스재즈와 컨트리뮤직, 그리고 초기 로큰롤을 듣는 것으로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고교 시절 그는 록밴드를 조직해 보비 비, 리틀 리처드와 같은 당대 유명 록 가수들의 노래를 모창하면서 대중음악인의 길로 들어선다. 그는 59년 미네소타주립대에 들어갔으나 2년 후 자진 중퇴하고 작곡과 밴드활동에 전념한다. 이후 딜런은 뉴욕 그린위치 빌리지로 옮겨 그의 멘토인 작곡가 겸 가수 우디 거스리(Woody Guthrie)와 함께 뉴욕의 여러 클럽에서 인디밴드 활동을 한다.

록음악 최대 축제 ‘우드스톡’ 창설
50∼60년대 미국 대중음악계는 엘비스 프레슬리를 비롯한 록 가수와 함께 비틀스와 롤링 스톤스 등 영국계 보컬그룹이 휩쓸고 있었다. 당시 이들 영국 보컬그룹의 미국 진출은 ‘영국의 침략(British Invasion)’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이들의 대약진은 미국 토종 대중음악을 크게 위축시켰다. 그래서 딜런은 미국 전통 대중음악을 부활시킨다는 취지에서 당시 절정의 인기를 누리던 록 음악과는 전혀 다른 포크송을 개발한다. 기존의 록 뮤직은 앰프를 통한 강렬한 전기기타 음이 주류였다. 이 자극적인 기계음에 피로감을 보이던 대중에게 딜런은 통기타와 하모니카 등을 조합한 포크송을 선사한다.

63년 딜런은 전통 흑인영가와 컨트리 송에서 발상을 얻어 불후의 대표곡인 ‘바람만이 아는 대답(Blowin’ in the Wind)’을 작곡해 발표한다. 사실 이 곡은 딜런의 노래보다는 당시 최고 인기를 누리던 3인조 혼성 포크송 보컬그룹 ‘피터, 폴 앤드 메리(Peter, Paul and Mary)’에 의해 더 히트한다. 이 그룹의 리드싱어인 피터 야로도 딜런과 절친한 유대인이다. 이 곡은 그 후 딜런이 작곡한 ‘시간은 바뀌고 있다(The Times They are A-Changing)’와 함께 미국의 민권운동과 베트남전 반전의식 고취를 위한 주제가로 활용된다.

딜런은 저항 예술인의 기수로 떠오르며 미국과 서구에서 유행하던 염세적 히피문화와도 접목한다. 미성(美聲)의 여성가수 조앤 바에즈는 딜런과 이념성향이 같았던 동료였다. 딜런의 작곡은 66년 이후에는 포크송과 록 음악을 믹스한 ‘포크 록’이라는 새로운 장르로 발전한다.

그의 음악세계는 69년 8월 뉴욕주의 조그만 마을인 우드스톡에서 열린 ‘우드스톡 페스티벌’이라는 대중음악 역사상 최대의 록 음악축제로도 연결된다. 꼬박 사흘간 논스톱 야외공연으로 진행된 이 음악제에는 당대의 인기가수 조앤 바에즈, 지미 헨드릭스, 재니스 조플린, 그룹 제퍼슨 에어플레인, 그룹 크로즈비·스틸스·내시 앤드 영 등을 비롯한 70여 명의 가수진과 50만 명의 관객이 참여했다.

진보 성향이 강했던 딜런에 대해 미국 남부 지역 보수파는 우호적이지 않았다. 이들은 심지어 딜런이 TV에 나오면 채널을 돌렸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는 대중음악인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최고의 영예를 얻었다. 82년에는 작곡가 명예의 전당, 88년에는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각각 입성하면서 2관왕을 달성했다. 88년 시사주간지 타임은 딜런을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명’에 포함시켰다.

79년엔 유대교 버리고 개신교로 개종
딜런은 어린 시절 유대식 가정교육을 받았으며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중요한 요식 절차인 성인식도 거쳤다. 뉴욕에서 활동하던 기간에도 유대교 정통파 랍비(목회자)와 친분을 쌓았다. 71년에는 이스라엘을 방문해 유대교도로서의 각별한 유대감을 보였다. 그의 작곡 중 일부는 유대 전통음악에서 차용한 것도 있었다. 그런데 딜런은 79년 돌연 개신교로 개종한다. 왜 개종했는지 이유가 밝혀지지 않은 가운데 랍비에 대한 실망 또는 여자 친구의 권유 등 다양한 소문만 돌 뿐이다.

딜런은 일생 동안 모두 4300회의 대중공연을 했다. 대부분 미국 또는 유럽에서 이뤄졌다. 칠순을 바라보던 그는 지난해 3월 한국 방문 공연을 열었다. 공연 중 그가 열창한 히트곡 ‘바람만이 아는 대답’은 50년 만에 한국 팬을 다시 열광시켰다. 올해 4월에는 중국과 베트남에서도 공연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상한 일이 생겼다. 중국 공연 전 그는 중국 문화부의 검열을 받고 반전곡인 ‘바람만이 아는 대답’과 ‘시간은 바뀌고 있다’ 등 두 곡을 레퍼토리에서 제외했다. 베트남에서도 사전 검열을 받았다. 이에 대해 휴먼라이츠워치 등 국제 인권단체들은 입을 모아 딜런을 비난했다. 60년대 미국의 반전운동을 주도하면서 ‘평화의 음유시인’으로 불리던 딜런이 독재국가에 굴복했다는 것이다. 패기에 찼던 딜런의 전성기였다면 도저히 상상도 못했을 일이다. 아마도 유대인의 정체성에 이어 평화·민권의 사도라는 딜런의 꿈과 이상도 바람에 날아가 버린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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