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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실서 장난하다 발견, 스타킹으로 여심 사로잡아

중앙선데이 2011.04.24 01:37 215호 32면 지면보기
옷은 날개다. 좋은 옷은 옷감이 좋아야 한다. 좋은 옷감은 좋은 옷을 넘어 새로운 문명과 문화의 큰 바람을 일으키기도 한다. 비단·면(綿)·나일론이 그 예다. 비단은 실크로드, 면은 산업혁명, 나일론(nylon)은 20세기 합성섬유의 시대를 열었다.

권기균의 과학과 문화 기적의 섬유 나일론

합성섬유의 대표 주자는 나일론·아크릴·폴리에스테르다. 그중 큰형이 나일론이다. 나일론은 섬유 이름이지만, 보통 폴리아미드계 수지를 ‘나일론’이라고 부른다.

나일론을 발명한 이는 월리스 캐러더스. 1896년 4월 27일 태어나 1937년 4월 28일 세상을 떴다. 생일 바로 다음 날 사망한 것이다. 그는 천재였다. 대학시절 학생 신분으로 후배들을 가르치는 강사가 될 정도였다.

캐러더스는 하버드대의 전임강사로 있다 두 배의 월급과 전폭적 지원을 약속받고 듀폰으로 옮겼다. 듀폰에서 그는 자동차 타이어용 네오프렌을 개발하고, 1935년 나일론도 개발했다. 둘 다 노벨상감이었다. 30년대 초 듀폰은 대공황의 위기 속에서 신제품 개발만이 대공황을 이기는 방법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공격적인 경영 전략을 취했다. 캐러더스 밑의 연구원만 230명이고, 연구비가 2000만 달러를 넘어섰다. 그 결과가 나일론의 발명이었다.

모든 발명에는 우연인 것 같은 사건이 생긴다. 이것을 세렌디피티(serendipity)라고 한다. 몰입하다 우연히 큰 발견을 하는 것을 말한다. 3M의 대명사처럼 된 ‘포스트 잇’도 그런 경우다. 보관 용기에 구멍이 생겨 새어 나온 니트로글리세린이 규조토와 섞인 것을 보고 다이너마이트 제조법을 발견한 노벨도 마찬가지다. 또 일본의 시라카와 히데키도 자기 밑에 있던 한국인 유학생이 밀리몰 단위를 몰 단위로 잘못 읽어서 촉매제의 양을 1000배나 잘못 넣는 바람에 ‘전기가 통하는 플라스틱’을 발견해 2000년 노벨화학상을 받았다.

나일론의 발명에도 이런 ‘우연한, 그러나 준비된 행운’이 찾아왔다. 같은 연구소의 줄리언 힐이 폴리에스테르를 유리막대기에 묻혀 장난 삼아 방안을 돌아다녔는데 이게 실처럼 길게 늘어났다. 캐러더스가 이 말을 듣고 녹는 점이 높은 폴리아미드로 같은 실험을 해보았더니 이 역시 실처럼 길게 늘어났다. 이게 나일론이다.

나일론으로 만든 첫 제품은 칫솔이었다. 1938년 2월 24일 듀폰은 나일론 칫솔을 처음 시판했다. 전에는 돼지털 칫솔이었다. 돼지털은 칫솔에서 빠져 툭하면 이에 끼었지만 나일론 칫솔은 단단히 박혀 그렇지 않았다. 듀폰은 나일론 칫솔을 ‘웨스트 박사의 기적의 칫솔’이라고 선전했다. 빨리 말라서 세균 번식도 막았다. 돼지털 칫솔 440년의 역사가 바뀌었다.

그리고 1938년 10월 27일 듀폰은 “강철보다 강하고, 거미줄보다 가늘다. 석탄과 공기와 물로 만들었는데, 탄성과 광택이 비단보다 더 우수하다”며 나일론 섬유를 공개했다. 1939년 뉴욕 세계박람회와 샌프란시스코 금문교박람회에 나일론 제품이 선보였다. 그리고 1940년 5월 15일 뉴욕에서 나일론 스타킹이 발매돼 불과 몇 시간 만에 400만 켤레가 팔렸다. 당시 실크스타킹은 한 켤레에 59센트, 나일론 스타킹은 1달러25센트로 두 배가 넘었는데도 한 해에 3600만 켤레나 팔렸다.

나일론(nylon)의 이름은 처음엔 ‘올이 풀리지 않는다’는 뜻의 ‘노런(no run)’이었다. 그러나 ‘점수를 못 낸다’는 뜻도 있어 ‘norun’을 거꾸로 ‘nuron’으로 했다. 이것은 ‘neuron(신경 단위인 뉴런)’과 발음이 같아 가운데 ‘r’을 ‘l’로 바꿔 ‘nulon’으로 했다가 발음이 어려워 ‘nilon’으로 바꿨다. 하지만 영국식으로는 다르게 읽을까봐 ‘nylon’으로 정했다.

1940년 듀폰의 존 에클베리는 “나일은 임의로 붙였고, ‘코튼’이나 레이온처럼 섬유 이름의 끝에서 어미 ‘온’(-on)을 따서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올이 풀리면 클레임이 발생할까봐’ New York의 머리글자 ‘NY’와 LONDON의 앞부분 ‘LON’을 합쳐서 ‘NYLON’으로 설명키로 했다는 해석도 있다.

그런데 캐러더스의 운명이 기구하다. 듀폰은 잘나갔지만 본인은 상사와의 갈등으로 우울증에 시달렸다. 그러다 자기의 발명품이 최고 인기 상품이 되는 것을 못 보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41세였다.

어쨌든 나일론은 의복뿐 아니라 낙하산·로프·텐트·절연제와 기계류의 부속에까지 사용돼 ‘기적의 섬유’로 칭송을 받았다.

듀폰은 70년 역사의 효자상품 나일론의 섬유 부문을 2004년 코흐 인더스트리라는 회사에 매각했다. 그리고 지금은 인조 대리석에서 방탄조끼 소재, 건축 단열재, 수영장 살균제, 제초제에 이르기까지 무려 1800여 개의 제품을 생산한다. 놀라운 것은 전체 매출 294억 달러(약 32조원)의 36%를 출시 5년 이하의 신제품에서 벌어들인다는 점이다. 210년 기업 듀폰의 새로운 도전정신이 또 어떤 결과를 만들어낼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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